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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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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울 것도 하나 없는 이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또 얼마나 지겨워져 가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너도 나를 사랑해달라고 말하면서도, 사랑이라는 게 뭔지 나는 종종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찾아봤지만, 오래된 것 중 확실한 건 없잖아.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내 것들에게 내어주기로 했다. ‘너는 나의 문학이야.’라고, 그렇게 말하기로 했다.”

싱어송라이터 박소은의 곡 <너는 나의 문학>의 도입부이다. 여느 때처럼 알고리즘에 의한 끝 모를 인터넷 유랑을 하던 중에, 이전에도 종종 즐겨보던 ‘온스테이지’ 채널의 라이브 영상을 보게 됐다. 영상에 등장하는 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도입부를 열고, 화면 너머에 있을 청자에게 ‘너’는 나의 설명할 수 없는 책, 헤밍웨이, 데미안, 노르웨이의 숲이라 말했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읽고 싶고, 달이 넘어갈 때까지 계속 보고 싶다는 싱어송라이터의 입에서는 4분 남짓한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노래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 등장했고, 그의 노랫말은 사랑이란 말 하나 없는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기자는 최근 성인이 되고 난 뒤 처음으로 제 이름을 건 공연을 하나 기획하게 됐다. 정신없이 공연을 마치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다음 공연 회의라는 명목으로 또 다른 뒤풀이를 하게 됐을 때였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고, 취기가 오를 때쯤 함께 공연을 만든 이의 입에서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이 나왔다. 자칫 오글거릴 수도 있는 물음이었기에 그에 맞춰 누군가의 진부하고도 뻔한 연애담이 답으로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누구 하나 그 주제에 대해 미리 의논한 적 없었으나 모두 저마다 좋아하는 밴드의 이름을 댔다. 좋아하는 음악의 노랫말, 좋아하는 밴드 멤버의 이야기, 언젠가 갔었던 공연의 즐거운 추억들.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대부분이 떠올릴 법한 그 흔한 얘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프로야구 시즌이 한창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야구와의 모든 연을 끊을 것처럼 성을 내던 팬도 다음 날 아침이 되면 휴대폰을 꺼내 들며 ‘오늘 경기 선발 투수가 누구야?’라는 말을 한다. 또한, 어느 날 이름 모를 인디 밴드의 공연을 보고 첫눈에 반한 이는 공연이 끝난 뒤 ‘다음 공연도 보러 갈게요.’라는 말로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대신한다. 누군가는 잠들기 전 연인의 ‘내일 연락해!’라는 문장에서 사랑을 느낀다. 기자는 오전 열한 시에서 오후 열두 시로 넘어갈 무렵이 되면 귀신같이 휴대폰으로 꽂혀 드는 어머니의 ‘점심은 뭐 먹었어?’라는 문자에서 사랑을 느끼고, 새로운 공연 소식이 뜨자마자 날아드는 ‘같이 보러 가자!’라는 친구의 메신저 알림에서 애정을 느낀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는 수도 없이 많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작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가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랑해’라는 말 하나로 ‘너는 나의 문학’이며, ‘해져 찢어질 때까지 계속 읽고’ 싶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 넘기고’ 싶다는 이 모든 생각을 전하기에는 어렵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두고 모두 다른 답을 내리고, 저마다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사랑한단 말 하나로 표현하기에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무궁무진하고도 방대한 감정이 순식간에 납작해지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를 대신할 새로운 단어와 문장을 찾는다.

만약 이 세상에서 ‘사랑해’라는 말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무슨 수로, 또 어떤 말로 사랑을 전할 것인가? 사랑이라는 말을 정의 내리기는 참 어렵다지만, 이미 나의 일상 곳곳에 사랑이 묻어있다. 지난 호 본지 COS 기사의 제목처럼 ‘삶과 사랑의 발음이 비슷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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