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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Ego)와 페르소나(Persona)를 향한 고군분투

나는 누구인가, 평생 물어온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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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금수(禽獸)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일까. 먹고 자는 본능적인 행위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인간과 금수의 차이는 자아(이하 에고)의 유무에 있다. 에고가 없는 금수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아 슬퍼하지도, 자기 계발을 도모하지도 않는다. 그저 본능에 맞춰 살아갈 뿐. 반면, 인간의 삶은 곧 에고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걸 어미에게 의탁했던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에고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의 결과가 곧 세상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또한, 에고의 변화는 너무나 격동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에고를 타인에게 쉽사리 보여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적 가면(이하 페르소나)을 쓰고, 에고를 숨기며 살아간다. 이러한 에고와 페르소나 사이의 고군분투를 보여주는 세 편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2006),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2013), <트루먼 쇼(The Truman Show)>(1998)를 만나보자.

 

[내 이름 석 자 그 가장 앞에 와야 할 But]

최고의 패션지《런웨이》에 입사한 ‘앤드리아’는 상상했던 화려한 삶과 전혀 다른 현실에 당혹감을 느낀다. 멋진 커리어우먼이 아닌, 편집장 ‘미란다’의 전담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일상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새벽에도 울리는 핸드폰, 매일 반복되는 야근, 칭찬 한마디 없는 냉혹한 상사에 퇴사를 고민하던 찰나, 때마침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기자로 일할 기회가 찾아온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모두가 선망하는 미란다의 비서직을 버리고, 남몰래 꿈꿔왔던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강력한 페르소나는 에고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앤드리아 역시 남들이 바라고, 자기 자신조차 선망했던 런웨이 편집장의 비서 자리를 당당히 꿰차지만 허영이 가득한 세계에 점점 동화되는 자신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실제로 처음에 등장한 그녀와 영화 후반부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다.  명품 브랜드의 철자조차 몰랐던 그녀지만, 점차 값비싼 옷을 찾고 지인과의 만남을 시시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네가 지미추의 신발을 신는 순간에, 이미 네 영혼을 판 거야.”라는 상사 에밀리의 말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부지불식간에 페르소나는 몸집을 불려 에고를 가려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앤드리아는 우연히 찾아온 기자가 될 기회 앞에서 가려졌던 에고를 다시 마주하고, 기꺼이 페르소나를 벗어던질 용기를 얻는다. 이를 ‘용기’라 칭함은, 잃었던 에고를 되찾을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쌓아왔던 페르소나를 내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이건 내가 아니다’라고 자각하더라도,《런웨이》편집장의 비서라는 가면을 벗는 데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미란다가 자신의 일을 버리고 기자를 택한 앤드리아를 위해 추천서를 써준 것 역시 그 용기의 가치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비대해진 페르소나에 무력감을 느낄 때면, 앤드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어보자. 기꺼이 에고를 내보일 용기 말이다.

 

[날 토로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나]

잡지사《라이프》에서 일하고 있는 ‘월터’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그의 상상 속에서 그는 폭파된 건물 속에서 강아지를 구하는 영웅이자 좋아하는 여성에게 서슴없이 관심을 표하는 저돌적인 남자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버티던 그는 폐간을 앞둔《라이프》의 마지막 표지 사진을 찾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이를 위해 월터는 사진사 ‘숀’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상상 속 그의 모습은 점차 현실이 된다. 숀을 만나러 가는 동안에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이가 운전하는 헬기를 타기도 하고,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고, 상어를 만나고, 히말라야를 등반하기도 한다. 비록 사진을 구하던 도중에 해고되어 처음의 목적을 잃어버렸지만, 월터는 개의치 않고 긴 여정을 거쳐 결국 숀을 만난다. 마침내 마주한 숀에게 들은 사진의 소재는 허무하게도 항상 지니고 다녔던 그의 지갑 속이었지만, 그는 숀을 만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상 속 자신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상상 속 자아는 발전의 동력이자 무료한 일상을 버틸 수 있는 희망이 돼주지만, 진정한 에고라고 할 순 없다.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으며, 현재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지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월터의 상상 속 영웅같은 그의 모습이 진정한 그의 자아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월터는 이러한 상상 속 자아를 진정한 자신의 에고로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을 무시하던 상사 ‘테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리 회사를 믿었던 직원을 배신하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를 건네고,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동료 ‘셰릴’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한다. 페르소나에 가려져서, 혹은 자신을 내보일 용기가 나지 않아 우리는 에고를 숨기며 살아가곤 한다. 월터의 모습을 따라 에고를 펼쳐나갈 용기를 얻어보면 어떨까. 상상을 뛰어넘는 에고가 당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고 사람들이 아는 나]

지금까지의 삶이 전세계인들에게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트루먼’은 이 소름 돋는 물음에 해맑은 인사로 답한다.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트루먼은 하늘에서 방송용 조명이 떨어지고, 라디오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중계되는 등 기이한 일들을 겪으며 자신의 삶이 각본으로 짜여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든 자신을 프로그램 속에서 살게 하려는 제작진의 방해에도 결국 그는 스튜디오를 벗어나 첫사랑 ‘실비아’가 있는 피지로 향한다.

나만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실과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까발려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페르소나를 강제로 벗기고 에고를 흔든다. 우리가 페르소나를 만들어 살아가면서도 이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에고가 중심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평가에 상관없이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나의 모습이 있기에 다양한 페르소나를 형성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에고에 대한 완고한 믿음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페르소나와 에고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진정한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트루먼이 사실은 각본 속 트루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인생이 생중계된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에고가 흔들릴 만한 경험을 겪기도 한다. 이때, 트루먼의 항해를 기억하며 단단한 에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어떨까. 항해 끝엔 해맑은 인사가 기다릴 것을 믿으며 말이다. 세 작품은 에고와 페르소나의 관계를 다각도로 비춘다. 양팔 저울의 양쪽에 에고와 페르소나를 각각 올려놓은 것처럼 어느 한쪽이 무거워지면, 다른 한쪽은 위로 둥실 떠오를 수밖에 없다. 위로 떠오르는 것이 에고가 된다면 페르소나에 잡아먹혀 중심이 없는 사람이, 페르소나가 된다면 자신의 밑바닥까지 전부 보여주는 사회성 없는 사람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에 마주할 때면 앤드리아와 월터, 그리고 트루먼의 고군분투를 기억하자. 그 끝에 얼마나 단단한 에고와 빛나는 페르소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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