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서울 종로구 궁정동을 따라간 '남산의 부장들'(2020)

흔들린 충성, 그날의 총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산의 부장들'(2020)/출처: 서울경제
▲'남산의 부장들'(2020)/출처: 서울경제

“1961년 5월 16일, 한 무리의 군인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제3공화국을 출범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설립했다...(중략)... 남산에 자리한 중앙정보부는 그 존재만으로 공포의 대상이 됐다. 대한민국의 2인자로 군림했던 중앙정보부장들을 사람들은 ‘남산의 부장들’이라 불렀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의 시작을 알리는 자막이다. 영화는 10·26 사태가 발생하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해 다룬다. 10·26 사태는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으로, 18년간 지속된 독재정권의 종말을 알린 사건이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육군 본부에 몸담았던 ‘남산의 부장들’을 보고 따라가 보았다.

 

박용각: 전 한국 최고 정보기관의 책임자였습니다. 썩은 권력을 탐욕스럽게 먹던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바로 그 썩은 권력의 맨 끝에! 맨 끝에 있는 한 사람을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프레지던트 박!

 

사건 발생 40일 전, 한국 정부가 미국 하원에 막대한 로비를 제공했다는 ‘코리아게이트(Koreagate)’가 터지며 미국이 시끌벅적해진다. ‘박통’의 2인자이자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박용각’은 미국에서 열린 청문회에 참석해 정권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뿐만 아니라 박용각은 FBI와 외신 기자들에게 박통의 치부를 알렸고, 스위스 비밀계좌에 관해서는 회고록을 작성하기까지 한다. 그의 배신에 분노한 박통은 현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에게 “그 배신자 XX를 어떻게 하면 좋겠나?”라고 물었고, 김 부장은 자신이 직접 미국에 가 조용히 해결하겠다고 답한다.

 

박통: 김 부장도 내가 그만두기를 바라나?

김규평: (머뭇거리다가)제가...각하 옆을 지키겠습니다.

 

믿었던 박용각의 배신과 미국의 압박이 계속되자 박통은 위기를 직감한다. 그리고 김 부장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김 부장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박통에게 충성한다. 그렇게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김규평은 박용각을 만난다. 사실 둘은 박통의 ‘혁명’의 동지이자 친구, 그리고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선후배로 막역한 사이다. 규평은 용각에게 스위스 비밀계좌에 관한 회고록을 내놓고 ‘각하(박통)’께 용서를 빌라고 설득하지만, 용각은 되려 규평을 설득한다. 스위스 비밀계좌를 중정 사람이 아닌 ‘이아고’라는 사람을 통해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며 “그런 인물에게 밀리는 너하고 나하고 그냥 머슴 짓한 거다.”라고 말이다. 이때 규평의 눈은 매우 흔들린다. 하지만 여전히 박통에게 충성하는 김 부장은 용각과 친한 로비스트 ‘데보라 심’을 포섭해 회고록 원본을 넘겨받아 청와대로 향한다. 청와대로 향하던 중, 청와대 주변에서 탱크를 돌리며 공포심을 조장하는 광경을 보고 김 부장은 분노한다. 이는 박통을 지키겠답시고 탱크를 돌리고, 야당 의원들을 협박하며 청와대와 국회 관계를 악화시키던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의 짓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여긴 김 부장은 곽 실장을 찾아간다.

 

김규평: 사람은 인격이라는 게 있고, 국가는 국격이라는 게 있어. 여기 청와대야. 인격과 국격이 어우러지는 곳이야. 한 번만 더 탱크 돌리면, 탱크로 경호실부터 뭉개버릴 줄 알아. 미친X처럼 날뛰지 말고! 각하 경호나 잘해. 알았나, 곽 중령.

곽상천: 어이, 김 부장. 각하가 국가야. 국가 지키는 게 내 일이야. 김 부장이야말로 자기가 할 일을 정확히 몰라? 거기에 써 있잖아. 대문 앞에. 음지에서 지X하고 양지를 뭐 어쩐다? 그냥 자기 자신을 버섯, 이끼 그런 걸로 여기고 축축하고 꿉꿉한 곳에서 묵묵히 일해!

 

김 부장은 군 경력도, 나이도, 박통과의 인연도 자신보다 훨씬 모자람에도 매섭게 치고 올라오는 곽 실장이 대들자 분노하며 권총 손잡이로 곽 실장의 머리를 내려친다. 곽 실장은 이번에도 참지 않고 대들었고, 둘은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치고받고 싸운다. 그렇게 박통의 신임을 얻기 위한 둘의 ‘충성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둘이 멱살을 잡고 싸운 곳이자, 박통의 공간인 청와대이다. 기자가 보따리 취재를 하며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다. 관람 예약을 하고 방문한 청와대는 기대 이상이었다. 평소라면 삼엄한 경비가 서 있었을 공간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자유롭게 둘러보고 있는 광경이 신선했다. 질서를 지켜 천천히 걸으며 내부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기자는 특히 ‘대통령 집무실’에 주목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곳이기도 하고 박통이 자신의 옆을 지키던 이들을 격려하기도, 버리기도 하는 모순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부장은 이곳에서 박통에게 끊임없이 배신감을 느낀다. 야속하게도 미국 정부에서 박통 집무실에 설치한 도청기를 첩보기관의 수장인 김 부장보다 곽 실장이 먼저 발견하게 된다. 이에 강한 위기감을 느낀 김 부장은 ‘고종의 길’을 지나 주한미국대사 ‘로버트’를 찾아가 청와대 도청에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 

 

▲고종의 길

이곳이 덕수궁 돌담길에서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고종의 길’이다. 고종의 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지나던 길이다. 지금은 걷기 좋은 산책로라고 소개되는 장소 중 하나인 데다, 실제 기자가 걸었던 길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힘없는 나라의 왕의 피난길이었고 영화 속에서는 김 부장이 박통의 신뢰를 얻기 위해 발버둥 치며 지나던 길이다.

한편, 청와대에서는 보안사령관이 박통에게 책 한 권을 건넨다. 바로 일본에서 출간된 박용각의 회고록이다. 직접 받은 원고를 회수해 박통에게 전달했음에도 누군가가 유출해 출판까지 한 것이다. 격노한 박통은 그날 밤 김 부장을 호출하고, 회고록 출판 소식이 실린 신문으로 김 부장의 머리를 세게 내리친다. 이 사건 이후 김 부장은 박통에게 외면당하고, 곽 실장이 박통의 옆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박통과 멀어져가던 어느 날 한밤중에 박통이 갑자기 양주 한 병을 들고 남산 중정에 직접 찾아온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 부장은 박용각에 관해 묻는다.

 

김규평: 각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박통: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박용각을 살릴지 곽 실장보다 먼저 나서 그를 죽일지 고민하던 김 부장은 박통의 말을 듣고 결심한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 위해 곽 실장보다 먼저 그를 제거하기로. 김 부장은 미리 파견 보낸 자신의 요원을 통해 데보라 심을 프랑스로 불러 또다시 그를 포섭한다. 그렇게 박용각을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박용각은 납치되어 도주하던 중 김 부장의 요원에 의해 사살된다. 한국에서 암살 성공 소식을 들은 김 부장은 자기 손으로 친구이자 혁명의 동지를 죽였다는 사실에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박통과의 관계 회복을 기대한다.

박통의 신뢰를 다시 얻었다고 생각한 김 부장은 박통에게 암살 소식을 전하며 부산과 마산에 내린 계엄령을 철회할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하지만 박통은 “지금 나 협박해?”라며 박용각이 숨긴 돈이나 찾아오라 한다. 강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김 부장은 담배 한 대 달라는 박통의 요구에 담뱃갑을 구겨 버린다. 박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곽 실장이 건네준 담배를 받으며 또다시 김 부장은 박통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대로라면 정말 버림받을 것이라는 위기를 느낀 김 부장은 곽 실장과 박통의 술자리에 잠입해 도청한다. 잠시 곽 실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박통과 이아고의 전화 내용을 들은 김 부장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동안 이아고를 시켜 김 부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도청해왔던 것이다. 박통은 김 부장이 ‘미국에게 붙어먹고 친구나 죽인 교활한 백정 같은 배신자’라며 이아고에게도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한다. 이제는 박통에 대한 김 부장의 신뢰도, 인내심도 완전히 바닥났다.

 

김규평: 나라가 잘못되면, 다 죽는다. 각오는 돼 있겠지? (총을 보여주며) 참모총장도 와있다. 거사가 끝나면 참모총장을 데리고 남산으로 가서 군을 장악한다.

 

그렇게 1979년 10월 26일 밤에 열린 만찬에서 규평은 거사를 치른다.

 

김규평: 각하를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합니다. (탕)

 

▲옛 중앙정보부 사무동
▲옛 중앙정보부 사무동

영화는 규평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말을 전하며 끝이 난다. 기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규평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게 됐다. 이병헌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더해 충성을 바치던 이에게 총을 겨누기까지의 감정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었다. 여기는 규평의 공간인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예장공원이다. 중정은 지금은 모두 사라져 터만 남아있거나 이렇게 표지판으로만 남아있다. 이곳 역시 악랄한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는 평화롭다.

 

박용각: 그 XX들 세상이 언제쯤 끝날까?

데보라 심: 세상이 바뀌겠어? 이름만 바뀌지.

 

박용각이 박통에게 버림받고 회의감을 느끼며 뱉은 말에 데보라 심은 위처럼 답한다. 1326호가 발간되는 16일(화)은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한 지 62년째 되는 날이다. 그날은 누군가에겐 ‘혁명’이었을 테지만, 역사에는 ‘정변’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자유민주주의가 있기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용기와 희생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기자가 따라가 보았던 장소들이 평화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이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