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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안은영의 세상, '보건교사 안은영'(2020)

피할 수 없는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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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포스터

여기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보는 능력을 타고난 한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안은영’, 목련고등학교의 보건교사다. 방금 말한 젤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먹는 젤리가 아니다. 그건 사람의 감정일 수도, 누군가의 흔적일 수도, 죽은 자의 영혼일 수도 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 무슨 헛소리인가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 젤리를 빼놓고 은영의 인생을 이야기할 순 없다. 총 6부작으로 이루어진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2020)은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안은영의 인생을 담아냈다. 지금까지의 모든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넘어서는 독특함과 황당함을 가진 작품이래도 무방할 만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수도 있다. 특이하고 신비로운 것들을 좋아하는 기자는 은영의 이야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지만 말이다. 이상하고 황당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안은영의 일상을 따라 가보자.

 

은영: 엄마는 내가 끝까지 모르길 바랐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젤리를 만든다는 걸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중략)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오산고등학교 입구. 안은영의 출근길이다.
▲오산고등학교 전경. 여러 공간을 이어붙여 목련고등학교가 만들어졌다.
▲오산고등학교 전경. 여러 공간을 이어붙여 목련고등학교가 만들어졌다.
▲원어민 교사 메켄지가 이끼를 심던 장소. 정독도서관에서 촬영했다.
▲원어민 교사 메켄지가 이끼를 심던 장소. 정독도서관에서 촬영했다.

이야기의 주 배경인 목련고등학교는 여러 곳에서 촬영한 후 한 공간인 것처럼 편집하고 CG작업을 더해 만들어졌다. 기자는 촬영지들 중에서도 오산고등학교와 정독도서관을 방문했다. 그중 첫번째로 찾아간 오산고등학교는 오르막길을 꽤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등교나 출근을 해서 공부나 일을 하고, 다시 또 하고…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보내는 것만으로 버거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은영은 거기에 젤리가 보이는 새삼 특이한 능력까지 추가됐다. 은영은 보건교사로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더해 시간 날 때마다 학교 곳곳의 젤리들을 처리한다. 젤리들은 시간이 흐르면 보통 바스라져 사라지지만 때론 해로운 젤리로 남아 사람들을 해치기도 한다. 은영은 그런 젤리들을 장난감 칼과 총으로 없애버리는 것이다. 사실 은영의 입장에서는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인 일이다. 은영이 학교의 해로운 젤리들을 없애버린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한 보건교사라며 수근대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은영의 눈에 사람들을 괴롭히는 젤리가 보이는 이상,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돈 한푼 안 받고 이상한 이미지만 쌓이는 비자발적 영웅이 탄생했다. 비록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욕은 한 바가지로 하지만 말이다.

 

은영: 이런 말 하면 제가 이상하게 보일 텐데, 솔직히 기운이 좀 특별하세요. 인상이 참 좋으세요. 혹시 도를 아세요?

인표: 미친 거지, 진짜.

 

사실 은영의 인생만큼이나 은영의 성격도 독특하다. 젤리가 보이는 인생의 어쩔 수 없는 결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 은영이 살아온,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에 특별한 남자 하나가 들어온다. 그는 목련고등학교의 한문교사 ‘홍인표’로 특별한 보호막을 지니고 살아간다. 물론 그 보호막은 은영의 눈에만 보인다. 은영은 우연한 기회로 인표의 손을 잡게 되고 인표와 손을 잡으면 자신이 ‘충전’된다는 걸 알게 된다. 이후 둘은 종종 손을 잡곤 한다. 손을 잡으면 특별한 기운이 생긴다는 설정은 마법 소녀가 나오는 만화를 보는 것만 같다. 이야기는 내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평범한 학교 같으면 있을 리가 없는 아주 깊숙한 지하실에 들어가기도 하고 학교 운동장에 끔찍하게 생긴 아주 거대한 젤리 괴물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학교를 소독해 주던 업체가 알고보니 젤리와 관련된 비밀스런 집단이었고 ‘재수 옴 붙었다’할 때 그 옴을 잡는 옴잡이 학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원어민 선생 ‘매켄지’가 실은 젤리를 잡아다 팔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은영의 이야기에 누군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드라마를 꺼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작가의 상상력이 차고 넘치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할 거라는 것이다. 보는 내내 황당하겠지만, 일단 한번 끝까지 보고 작품을 평가해도 늦지 않다.

▲은영과 강선이 오랜만에 재회한 가로등 밑
▲은영과 강선이 오랜만에 재회한 가로등 밑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은영에게 옛 친구가 찾아온다. 은영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강선’이 가로등 밑에서 은영을 기다리고 있다. 은영은 강선을 발견하고 약간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반갑게 그를 맞아준다. 강선은 그런 은영에 자신이 통 부스러지지 않는다며 멋쩍게 웃는다. 둘은 고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 술집에서 불이 나 죽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은영의 집으로 걷는다.

 

은영: 나만 보면 살려달라고. 자기 얘기 좀 들어달라고 붙잡고 늘어지는데, 너무 무서웠어.

강선: 무서웠겠다, 너.

은영: 내가 무서웠던 건 그 언니들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계속 살아야 된다는 사실이 그땐 너무 무서웠어.

 

알면서 피할 수 없는 일은 뭐 어떡하겠어. 당해야지. 강선은 은영의 말을 담담히 들어주며 덧붙인다. 강선은 은영의 이야기를 믿어준 첫 사람이다. 둘의 삶은 전혀 다르면서도 닮은 구석이 있다. 은영은 젤리가 보여 남을 도울 수밖에 없는 원한 적 없던 운명을 안고 태어났고, 강선은 살인 청부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모두가 꺼려하는 아이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왔다. 은영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젤리를 처치하며 비자발적 영웅이 되었고 강선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뛰며 집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강선이 죽었다. 공사장에서 크레인이 무너져 그대로 깔려 죽었다. 그후, 젤리가 되어 은영을 찾아온 것이다. 강선의 말로는, 사람 목숨보다 기곗값이 비싸기에 오래된 크레인을 쓰다 벌어진 사고였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이다. 이것도 강선이 말한 당해야만 했던 일인 걸까. 어쩔 수 없는 일은 당할 수밖에 없단 건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강선이 이 말을 은영에게 위로의 의미로 건넸던 건 일이 일어나는 대로, 내가 흔들리는 대로 당하라는 건 아니었을 거다. 다만 그래도 우린 남은 인생을 살아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너무 아파하지 말고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자는 말 아니었을까. 강선은 결국 은영의 눈앞에서 부스러지며 사라진다. 은영은 아이처럼 엉엉 울며 바가지와 대야로 강선을 잡아본다. 당연히 잡히진 않는다. 은영이 죽은 강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강선의 죽음 또한 은영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 당해야만 했던 일이었을 거다. 그 후 은영의 눈에 한동안 젤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나 하다가도 은영은 스스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비록 후회는 잔뜩 했지만 말이다.   

 

은영: 잠깐이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나를 계획한 누군가는 결국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왜 내게 숨겼나요? 강선이가 그랬어요. 피할 수 없다면 당해야지.

 

사실 은영의 눈에 보이는 젤리가 원래부터 알록달록 귀여웠던 건 아니었다. 은영이 처음부터 형광 색깔 장난감 칼과 총을 가지고 젤리들을 처리하며 다닌 것도 아니다. 은영의 인생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결은 다르지만 우리의 일상도 별반 다르진 않다. 다만 은영은 자신이 어떻게 이 인생을 살아 나갈지 스스로 선택했다. 칙칙하고 우울한 이야기 말고 밝고 경쾌한 모험 만화 같은 인생을 말이다. 우리에게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들은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게 강선이 마지막으로 은영에게 해주고픈 말이 아니었을까.

 

강선: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그럴수록 칙칙하게 가지 말고 달리는 모험 만화로 가야 해. (중략)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가란 말이야.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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