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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우리가 아픔을 딛고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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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부터)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 공식 예고편
▲(위쪽부터)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 공식 예고편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1973~) 감독은 <스즈메의 문단속(すずめの締まり)>(2022)의 개봉으로 재난 3부작을 완성했다. <너의 이름은.(君の名は。)>(2017), <날씨의 아이(天気の子)>(2019), <스즈메의 문단속>은 모두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감독은 위 영화들을 통해 재난을 막아내거나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을 향해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기자는 감독의 작품에 위로 받은 관객 중 한 명으로서 영화가 사실적이지만 환상적으로 담아낸 도쿄를 찾아 가기로 했다.

 

미야미즈 히토하: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結び),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모두 신의 영역이야. 우리가 만드는 매듭 끈도 신의 능력,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한 거란다. 한데 모여들어 형태를 만들고 꼬이고 엉키고 때로는 돌아오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고. 그것이 무스비. 그것이 시간.

 

<너의 이름은.>은 한 시골 마을에 혜성이 충돌하며 생긴 재난에 대해 다룬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대에 살아가는 ‘타키’와 ‘미츠하’의 몸이 바뀌는 일이 계속된다. 어느 날부터 더 이상 몸이 바뀌지 않자 타키는 미츠하를 찾아간다. 폐허가 된 마을을 마주한 타키는 그제야 미츠하가 3년 전 혜성 충돌로 죽은 사람임을 깨닫는다. 미츠하를 구하기 위해 타키는 미츠하가 입으로 빚은 술을 마시게 되고, 이를 통해 이어지게 된 둘은 재난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속 혜성 충돌은 한 마을을 집어삼킨 재난임에도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간다. 1200년 주기의 혜성 충돌로 미츠하의 마을에는 운석호가 생겼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미츠하 가문의 미야미즈 신사가 존재하지만, 기록의 손실로 누구도 그들이 무엇을 기리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타키 또한 미츠하를 직접 찾아가기 전까지 3년 전 일어났던 혜성 충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구해낸 이후, 서로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음에도 타키는 ‘운석이 떨어진 마을’에 집착하며 도쿄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오직 타키만이 그날의 재난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감독은 재난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기억하고, 재난이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다.

▲스가 신사 앞 계단
▲스가 신사 앞 계단

기자는 타키와 미츠하가 재회하게 되는 스가신사(須我神社) 앞 한 계단을 찾았다. 지나치는 지하철 안에서 눈이 마주치고 그동안 찾고 있던 것이 서로였음을 느낀 둘은 상대를 찾아 헤매다 결국 계단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다. 이유 모를 강한 이끌림, 하지만 그것 또한 ‘무스비’다. 기자는 그 계단에서 ‘운명’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됐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운명에 관해 말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타키와 미츠하의 몸이 바뀐 것도, 그들이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고 마주하게 된 것도, 미츠하가 이유 모를 전통을 지키며 신을 섬기는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그러한 가문이 자리 잡은 마을에 세 번의 재앙이 닥친 것도 모두 운명이자 신의 뜻이다. 운명 앞에서 인간은 연약한 존재로 비치지만, 결국 선택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 본인이다. 타키와 미츠하는 혜성 충돌로 죽을 운명이었던 마을 사람들을 구해냈고, 황혼의 시간이 끝나면 서로를 잊을 운명임에도 서로가 자신의 반쪽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계속해서 기억해 내려 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의지가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아마노 히나: 인간 제물이래, 나. 나츠미상이 알려주었어. 날씨를 맑아지게 하는 여자의 운명이라고. 날씨를 맑아지게 하는 여자는 인간 제물이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성난 날씨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거래.

 

<날씨의 아이> 속 도쿄는 아예 물속에 잠긴다. 이상기후로 인해 비가 그치지 않던 어느 날, ‘호다카’는 자신이 날씨를 맑게 만들 수 있다는 ‘맑음 소녀’ ‘히나’를 만나게 된다. 히나가 기도를 하면 거짓말처럼 비는 그쳤고, 둘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맑음 소녀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비를 멈추게 하면 할수록 히나의 몸은 사라져갔다. 결국 히나는 하늘의 제물이 되고 길었던 장마는 끝이 난다. 사람들은 그저 맑아진 하늘에 기뻐했지만, 오직 호다카만이 히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다. 히나가 현실로 돌아오자 비는 다시 미친 듯이 퍼붓기 시작했고, 그렇게 도쿄는 물에 잠겨간다.

▲가부키초
▲가부키초

기자는 신주쿠(新宿) 일대를 돌아보며 호다카와 히나의 흔적을 찾았다. 호다카가 양아치들에게 끌려간 히나를 구해주기도,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하기도 한 가부키초(歌舞伎町)와 호다카를 쫓던 경찰들이 서 있던 오오가드 골목길, 히나를 구하기 위해 호다카가 달렸던 선로 등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영화 속 장소들이었다. 신주쿠의 밤거리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고,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풍경은 마치 함께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날씨의 아이>는 불공평한 희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히나의 희생으로 하늘이 맑아졌지만,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재난이 낳은 희생자, 더 나아가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젊은 세대의 희생들을 묵인하고 살아간다. 히나를 구하는 호다카의 모습은 이러한 희생을 더 이상 모르는 체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재난 속에 좌절하지 않고, 소수가 아닌 모두가 함께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무나카타 소타: 목숨이 덧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앞으로 1년, 하루, 아니 아주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용맹하신 큰 신이시여 부디, 부디 부탁드리옵나이다.

 

규슈(九州)의 한 마을에 사는 ‘스즈메’는 폐허를 찾는 남자 ‘소타’와 마주한다. 그를 따라간 산속 폐허에서 발견한 낡은 문을 열자 지진을 일으키는 재난의 힘, ‘미미즈’가 문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스즈메와 소타는 지진을 막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미미즈를 문 안에 가두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2011년 일어났던 동일본 대지진을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 또한 대지진이 일어났던 장소들을 따라 진행된다. 동일본 대지진은 역사상 재산 피해액이 가장 큰 참사로 기록되고, 이 지진이 불러온 쓰나미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을 불러와 그 피해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 스즈메 또한 쓰나미로 엄마를 잃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 스즈메와 소타는 재난으로 인해 피해 입은 이들을 추억하고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의 힘을 빌려 재난을 막아낸다. 재난을 막기 위한 여정 속에서도 계속해서 주변 인물들의 도움을 받으며 나아간다. 이렇듯 감독은 재난이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 단순한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억하며 연대를 통해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오차노미즈와 히지리바시 다리

기자는 도쿄의 문이 존재하는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역 위의 히지리바시(聖橋) 다리를 찾았다. 깊은 터널에서 빠르게 열차가 나오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 미미즈가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모습과 닮아 보였다. 다리의 주변에는 여러 상점이 모여 있었고, 플리마켓(Flea Market)을 열거나 휴식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했다. 재난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일상에 재난의 위험이 언제나 서려 있음을 강조하며, 예기치 못한 재난에 상처 입은 이들을 헤아리고자 했다.

 

세 영화 모두 ‘신’이라는 존재가 영화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신은 행동의 원동력이자 그 목적 자체가 될 수도 있고, 그들과 아주 가깝다가도 먼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렇듯 일본에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있다. 지리적으로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일본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재난의 이유를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억울한 상황들을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가오는 운명에 쉽게 순응하지 않았다. 서로 잊지 않기 위해, 함께 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운명을 거스르고 굴하지 않는 힘을 보여줬다. 그것이 아픔을 딛고 나아가는 진정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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