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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쓰는 뻔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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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야든 처음에는 조금 진부할지라도 정석을 따를 필요가 있다. 기존 체제를 완벽히 숙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체제로의 혁신을 시도하는 것은 오만이며 방종이다. S동 211호 글을 밤새 고쳐 쓰며 이를 제대로 깨닫게 됐다.

기자는 이번에 처음으로 S동 211호를 맡게 됐다. 전에 없던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품고서 기자는 소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감 하루 전, 드디어 근사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에 없던 구성과 소재로 나름의 메시지까지 전달하는, 써놓고 보니 제법 뿌듯해지는 글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미숙한 상태에서 시도하는 혁신은 좋은 결말로 이어질 수 없다. 기삿거리를 판단하는 안목은 부족했고, 그런 기자의 오피니언은 당연히 파국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이렇게 밤을 새가며 새로운 S동 211호를 작성하고 있다. 고된 밤샘을 겪고 나니 무슨 일이 있어도 기사 기각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다른 기자들과 이후 들어올 후배 기자들도 이 점을 반드시 명심했으면 한다. 밤샘은 몸에 나쁘다.

기자는 이번 학기부터 부편집국장 업무를 수행하게 됐다. 마냥 즐거웠던 수습 시절과 비교해 확실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피드백’이다. 이전까지는 수동적으로 기사 피드백을 받기만 했으나 이제 다른 기자들에게 피드백을 주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기자가 작성한 기사들을 피드백을 수용하여 수정하는 동시에 다른 기사를 어떻게 수정하면 좋을지 알려줘야 한다는 점은 의외로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사진 피드백도 부국장의 담당이다. 실제로 기사 마감을 진행해보니 일의 우선순위도 마구 꼬이고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피드백 업무 자체는 할만했다. 글쓰기보다 글 고치기가 확실히 편했다. 기사를 처음 작성하려 할 때, 눈앞에 놓이는 백지(白紙)는 그 자체로 큰 압박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멀거니 바라보게 된다. 어렵사리 글을 쓰기 시작해도 글의 방향이 올바른지, 조금 더 적절한 어휘는 무엇일지 고민하다 보면 글이 써지는 속도가 무척 느려진다. 속도감이 없으면 글쓰기의 재미가 줄어들고, 그러면 글쓰기 속도는 더욱 지지부진해진다. 이 과정을 꾸역꾸역 통과해 글을 완성하더라도 문제는 남아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마저도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그의 초고가 쓰레기라면 기자의 초고는 대체 무엇에 빗대어야 할까.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써낸 결과물이 쓰레기보다 못한 것임을 퇴고 과정에서 스스로 확인할 때면 자존감이 적잖이 깎여나간다.

반면 다른 기자의 글을 읽고 첨삭하는 일은 훨씬 쉽고 빠르다. 우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무엇보다 피드백할 때는 자신의 글쓰기 실력이 미진할지라도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직접 글을 쓸 때는 글자 하나하나에 필력을 담게 되지만 타인이 쓴 글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다. 아는 바가 적어 글을 크게 수정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느끼게 되는 죄책감이 적다. 무엇보다도 피드백할 점이 많지 않은 경우, 그것이 필자의 우수한 글 덕분인지 피드백을 주는 기자의 무지 때문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고칠 점이 적은 글을 만나면 글도 깔끔하고 피드백도 빨리 끝나서 마냥 기분이 좋다. 그 이면에 숨겨진 필력 문제는 애써 외면하며 ‘좋은게 좋은거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글 고치기에 대한 기자의 선호 역시 이러한 도피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도피할수는 없다. 만화 <베르세르크(BERSERK)>에선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거야.”라고 말한다. 결국 기자의 본질은 글을 쓰는 사람이며 기자를 계속하는 한 글쓰기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 글쓰기에 대한 회의는 의식 저 편으로 치워두고, 글쓰기로의 회귀(回歸)를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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