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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지, '얼' 1979년, 캔버스에 유화물감,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박물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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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지, '얼' 1979년, 캔버스에 유화물감,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정지, '얼' 1979년, 캔버스에 유화물감,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정지(1943-2021)는 남성 중심의 단색화 열풍 속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여성 추상화가이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홍익대학교,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여성이 작업으로 주목받는 것은 물론 지속적으로 작업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던 상황에서 단색화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단색화 사단에 한정시키지 않고 그림에 서체를 도입하는 등 부단한 실험으로 독보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였다. 

작가의 작업은 크게 1960-70년대, 1980년대, 1990년 중반 이후의 세 가지 변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초기 작품 시기인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화면에서 이미지를 지워가는 실험의 시기이다. 주로 삶의 내용과 선호하는 사물 등을 주제로 삼았는데, 이미지의 잔상을 화면의 중심에 담는 방식으로 형상을 지워 나갔다. 1980년대에 이르면 이미지는 사라지고 롤러와 나이프를 이용한 축적과 긁기의 반복된 행위가 중점이 된다. 익숙한 재료인 붓을 쓰지 않고 보조적 도구로 행위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린다는 의미보다는 행위 자체가 강조된다. 또한, 그리고 지우는 반복적 행위는 화면과 물감을 일체 시켜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주요 태도들은 그가 학교를 다녔던 당시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앵포르멜을 지지했던 영향을 반영한다. 이는 작가의 관습적 재현에서 벗어나 이미지를 지우려는 시도, 순수한 의미로서의 그리기와 행위 자체를 추구했던 태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0년대의 회갈색톤의 네모꼴이 반복되는 모노크롬 회화에서 1990년 중엽부터는 동양의 서체가 등장한다. 긁기라는 행위에 쓰기라는 행위를 더하면서 행위의 의미에 한 번 더 변화를 꾀한 것이다. 나이프를 이용해 물감을 긁어가며 재빠르게 쓰이는 서체들은 작품 내 부드러운 롤러 자국과 상충되며 조화를 이룬다.

홍익대학교 박물관의 소장품인 <얼>에서는 중심이 존재하는 1960-70년대의 화면 구성과, 1980년대의 즉흥적인 행위들을 위한 시도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우선 회갈색 물감의 롤러 자국으로 나눠진 양 사이드와 중심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에 따르면 갈색 물감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지의 색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이후까지 꾸준하게 사용한 색이기도 하다.

 넓게 바른 양쪽의 결 사이 중심으로 롤러로 만든 물감의 축적과 이를 재차 나이프로 긁어낸 여러 겹의 흔적에서 물감이 지닌 물성이 잘 드러난다. 중심 아래 나이프를 통해 지워내며 그려진 방사형의 모습은 마치 굳센 나무의 옹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제목인 <얼>과 같이 단단하고 질긴 정신의 뿌리와 연결되고, 자신만의 작업세계로 향하는 작가의 굳은 의지와 여정을 상기시킨다. 1979년 작품인 <얼>은 이정지의 실험기에서 1980년대 단색조 회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실험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얼>의 실험기를 지나 행위의 흔적과 물성을 살펴볼 수 있는 이정지의 1990년대 작품 <中-96-12>은 홍익대학교 박물관의 《또 다른 물성》 전시에서 2023년 11월 27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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