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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시인 동주』

시대의 암울 속에서 꾸준한 마음 하나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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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 표지/ 출처: 서울도서관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별 헤는 밤 中-

 

내외부적인 압력 속에서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변치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의 고통 속이라면 더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꾸준함을 실천한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시인 윤동주’다. 안소영 작가의 『시인 동주』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연구와 기록을 바탕으로 쓰인 시인의 일대기와도 같은 소설이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 책을 접하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어두운 기숙사 방에서 홀로 영화 <동주> (2016)를 봤던 기자의 마음속엔 여전히 윤동주 시인의 시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펼쳐 든 책을 따라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갔다.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 건물
▲윤동주 시인이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 3층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시인이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인 연세대학교 핀슨홀이다. 현재 핀슨홀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바뀌어 시인과 관련된 여러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시인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사촌인 수필가 송몽규(1917~1945)와 함께 경성 생활을 시작했다.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면 소설 속에 묘사된 비스듬한 천장 경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3층 다락방이 나온다. 신입생들이 주로 사용하던 이 공간에서 시인도 1학년 재학 당시 머물렀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한반도는 일본의 간섭하에 있었다. 우리말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어두운 미래 앞에서도, 시인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물론 의사 같은 안정적인 진로를 원하던 아버지와 진로 문제로 갈등을 빚었지만 말이다. 시인은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처중’, ‘김삼불’, ‘유영’ 그리고 송몽규 등 동기들과 함께 시와 소설, 그리고 신문에 기고된 기성 문인들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꿈을 키워나갔다. 소설 속 윤동주 시인이 동무들과 함께 문학에 대해 나눈 대화들을 읽다 보면 당시 그들이 가진 문학에 대한 사랑과 낭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나 점차 한국어 수업이 축소되고 교수들이 경찰서로 끌려가는 등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과는 달리 어두운 시대의 현실이 그들의 꿈을 집어삼키려 한다. 그래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인물들을 보면 아직은 희망이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이자 김송 소설가의 집터

윤동주 시인이 2학년이 되던 해, 시인은 학교 기숙사를 나와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유는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다시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가까워진 후배 ‘병욱’과 함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함께 하숙하기도 했다. 현재 시인이 지냈던 하숙집 건물은 남아있진 않지만, 서촌 골목 깊숙이 올라가다 보면 하숙집이 있던 자리에 ‘윤동주 하숙집터’라는 간판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이 살았던 때의 풍경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시인이 여전히 우리말로 시를 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 하숙집에는 김송의 어린 자녀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시인은 그 아이들을 통해 시대의 고통이 비단 청년들과 기성세대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선 그 시대에 관해 깊이 고민하고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아마 고향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 나오게 되면서, 경성 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직접 마주했던 기억들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단순히 듣는 것과 보는 것이 다르듯 시인에게 있어 경성 생활은 그의 작품에 진정성과 깊이감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다만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 中-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엔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을 떠났던 시절, 다다미(たたみ)가 깔린 작은 방에서 써낸 시다. 윤동주 시인은 항일 시인으로 독립운동가이다. 누군가는 학생 신분으로 시 몇 편 썼을 뿐인데 그게 어떻게 항일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을 쓰는 건 물론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죄가 되던 시절, 심지어 조선인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때에도 시인은 우리말로 시를 쓰고 읽었다. 배울 만큼 배운 지식인들조차 조국의 미래에 대해 어둡게 전망하고 존경했던 문인들의 변절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었을 그 시대에, 아직 제대로 알려진 시도 없는 무명 청년은 여전히 우리말로 글을 쓰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알고 꾸준함을 실천했다는 건 가볍게 볼 만한 행동이 아니다. 시인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문학에 대한 순수한 사랑, 함께 지냈던 친구들, 고향에 있는 가족들… 그런 것들이 이유였을까. 윤동주 시인은 광복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글들을 읽다보면 ‘시인이 만약 무사히 감옥에서 나와 광복을 맞이했다면, 유고 시집이 아니라 자신의 첫 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낼 수 있었다면, 그토록 좋아했던 정지용을 추모식에서가 아닌 생전에 직접 만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롭게 우리말로 글을 쓰지도, 작은 연정을 표현하지도, 마음껏 공부하는 것도 어려웠던 시대에 윤동주 시인의 삶은 그 자체로 빛이 났다.

아마 당시 윤동주 시인이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은 ‘무력감’이었을 것이다. 시대의 비극은 어느 한 개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지만, 그로 인해 산출되는 시대의 고통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개인들이 고스란히 버텨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이 시간을 버티며 주어진 날들을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요 근래도 별반 다르진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윤동주 시인의 시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깊은 성찰과 고뇌 속에서 탄생한 그의 시는 몇 줄의 위로가 되어 꾸준히 여러 사람들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 비록 시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말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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