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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 신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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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을 하는 것’과 ‘생각이 드는 것’. ‘사유’가 전자고 ‘직관’이 후자라면, 직관이란 결과만 의식에서 포착되는 사고이고, 사유란 과정부터 결과까지가 모두 포착되는 사고이다. 그러나 사유의 과정은 직관에서 비롯된, 직관을 보강 또는 반박하는 또 다른 직관의 연쇄가 아닌가? 그런데 직관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아닌가? 

뇌의 한 부분에서 직관이 발생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이를 인식한다. ‘모든 것을 회의하고, 생각하는 나의 존재만을 확신한다.’에서의 ‘나’는 단지 인식자로서의 ‘나’이다. 이로써 ‘나’는 뇌 한구석에 몰려 세상과 직관에 대해 멀찍이 관망하고 있는 형국에 처했다.

‘나’를 궁지에서 구원할 길은 없을까? 의식만을 확신한다면, 세계에 대한 가장 경제적인 도식은 필자의 직관으론 ‘오로지 의식’이다. 주장이 아니고 다만 가정이다. 이 가정하에, 실재 세계를 괄호 안으로 유폐시키고 나면 ‘인식됨이 곧 존재함’이라는 구원이 가능하다. 인즉존 사상으로 ‘나’는 어째 ‘세계’가 되어버렸다.

2. 사과를 두 번 떠올려 보자. 사과. 사과. 둘은 같은 존재자인가? 같다. 한편 다르다. 관념상 완전히 같다. 한편 서로 다른 시간 좌표를 점유하기에 완전히 다르다. 유사성에 의식을 지향하면 둘은 같고, 상이성에 지향하면 둘은 다르다. 다만 동시에 같으면서 다르지는 않다. 의식은 동시에 두 대상을 지향할 수 없고, 별시에 한 대상을 지향할 수도 없다. 한순간에 하나씩 매 순간 다르게. 이러한 의식 지향의 요동은 진릿값의 열린 가능성을 야기한다. 시간 예속성에 의식을 지향하면 만물은 유전하고, 시간 초월성에 의식을 지향하면 만물은 불변한다. 둘 중 하나가 참이라는 것이 아니다. 모순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 순간 의식이 지향하는 곳에 그 순간의 진리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A는 A이다.’라는 명제조차 항상 참이 아니다. 두 A 간 차이에 의식을 지향할 때 이는 거짓이다. 참/거짓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인식자의 지향에 달린 것이며, 무언가가 참인 이유는 참이라 가정하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논리학의 무의미를 말하지는 않는다. 동일률, 무(無)모순율, 배중률이 요동치지 않도록 굳게 가정하고 믿는다면 논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능할 것이다. 논리가 신념에 입각한다는 언짢음이 문제지만.

3. 앎은 참되고 정당화된 신념이랬다. 그러나 앞선 과정으로 참과 정당화는 절대성을 잃었다. 이에 ‘신념’만이 남는다. 수학이라는 체계도 공리라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같음’도, 직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기 위한, 의식적 항상성에 의한, 신념이다. 세상은 통용되는, 그러나 잠정적인 신념의 집합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극단적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에 맞닿아 있다. 우리는 세계에 선 단독자이며 대응은 각자의 몫이다. 필자의 대응은 일단, ‘인즉존과 오로지 신념’이다. 그러나 졸고(拙稿)에 언어적 고찰의 미숙, 자가당착, 순환논리 등 문제가 산적해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믿을만한 신념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인식자인 당신에게 고스란히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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