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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유령들에게 보내다

발버둥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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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외로운 존재다.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에 남겨졌다. 손을 뻗어 무언가를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으며, 사람들에게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즉 유령은, 극복할 수 없는 장벽에 의해 생자로부터 분리된 존재다. 타인과의 연결을 바라지만 이조차도 쉽지 않으며 오히려 부정당하고 미움, 두려움을 받기까지 한다.

독일의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 1960~)는 그만의 독특한 문법과 미학으로 현대 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어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는 주로 1990년대 이후 독일 예술영화계에 등장한 젊은 감독들을 지칭하는 ‘베를린파(Berlin school)’에 속한 감독으로 소개되며, 독일인들의 일상과 그 속에 자리한 사람들을 관찰하려는 노력과 함께 대중적 장르를 결합해 자신만의 영화관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됐거나 무언가가 결여된 이들을 조명하는 ‘유령 이미지’를 지속해서 천착해 다루는 점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의 섬세한 연출 방식과 야심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트랜짓(Transit)>(2020)에서 자세히 살펴봤다.

 

[봄맞이 대청소]

파리 거리에 독일군이 들이쳤다. 도시를 점령한 군인들은 신분증이 없는 이들을 닥치고 체포했다. 혹자에 따르면 ‘봄맞이 대청소’ 중이라고 한다. ‘게오르그’ 또한 도망자 신세다. 포위망은 좁혀오고 있었고 그는 어서 비점령 지대인 마르세유로 떠나야 했다. 게오르그는 자살한 유명 작가 ‘바이델’의 소지품들을 우연히 손에 넣는다. 첫째는 작가의 원고, 둘째는 멕시코 대사관에서 온 비자 발급 허가서, 마지막으로 작가의 아내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의 문면은 이러했다. “당신을 봐야 해요. 기다릴 테니 마르세유로 오세요. 당장 와요, 내 사랑! 멕시코에서 같이 새 삶을 시작해요!” 게오르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마르세유에 무사히 도착한다. 이곳은 아직 독일의 손이 닿지 않아 안전했다. 하지만 그는 지쳤고, 아무도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두가 그에게 무관심했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비참했다. 이때 한 여자가 반갑게 어깨를 두드린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님을 알고 황급히 자리를 달아난다. 그리고 게오르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다.

1940년 6월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전권을 위임받은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은 독일과의 협상을 통해 프랑스 남쪽에 *비시 정부를 설립한다. 이에 당시 프랑스를 떠날 수 있는 비자 발급이 가능한 도시는 니스와 마르세유뿐이었다.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유대계 독일인들은 독일군을 피해 마르세유에 모였고, 이곳에서 다시 제3국으로 탈주를 모색했다. 피난자 중에는 명망 있는 작가, 철학가, 사상가 등도 많았다. 출국을 위해 마르세유까지 도망쳐 내려온 이들은 대부분 불법적으로 프랑스 국경을 넘어갔다. 비자가 있다고 해도 출국 허가를 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유대계 독일인은 프랑스 경찰의 지독한 추격을 뿌리치고 몰래 리스본으로 탈출했고, 가까스로 뉴욕으로 가는 배를 타 살아남았다. 반면에 실패한 사람도 많았다. 한 철학자는 걸어서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나누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데 성공하며 스페인 입국을 시도한다. 하지만 스페인 세관에 붙잡히며 모든 희망을 잃게 되어 독약을 먹고 생을 마감했다. 앞서 언급한 탈출에 성공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계 독일인은 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이고 국경에 가로막혀 결국 음독자살을 택한 철학자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다.

이렇듯 <트랜짓>은 역사적 맥락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탈출을 꿈꾸고 비자 발급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게오르그가 멕시코 영사관에서 만난 지휘자는 카라카스에서 현대음악을 하는 상상을 하며 희망의 불씨를 지핀다. 개를 키우는 여성은 험한 인생을 살았는지 입도 험하다.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으며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어떤 고난을 겪으며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토로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죽는다. 끝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고 쓰러져 죽거나 자살한다. 어쩌면 마르세유를 떠돌던 그들이 죽어서 유령이 되어 도시를 배회할지도 모르겠다.

[떠나고 남겨진 사람들]

게오르그는 바이델의 물품을 영사관에 맡겨 돈을 받아낼 생각이었지만 영사는 그를 바이델로 오인한다. 그때부터 게오르그는 바이델이 돼 멕시코 비자를 발급받는다. 여자는 계속해서 게오르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곤 다시 돌아선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편지를 썼던 바이델의 아내였다. 마리는 바이델을 찾아 온 도시를 헤매고 있었다. 영사관에서의 목격담도 들리지만, 마리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게오르그는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내가 당신의 비자를 구해줄게요. 같이 멕시코로 떠나요. 그런 그에게 마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한다.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

쫓겨나듯이 떠났고 새로운 나라로 가기 위해 영사관을 떠도는 수많은 사람, 검문에 걸려 경찰에게 연행되는 불법 체류자. 마르세유를 떠나기 위해 승선표를 구하는 게오르그와 마리. 영화 속 모든 캐릭터는 유령처럼 보인다. 인간과 다른 인간, 또는 인간과 공간 사이에서 맥없이 배회하는 유령 말이다. 그리고 그 유령은 현대의 난민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영화는 시간적 배경을 제2차 세계대전에 두지만 그 공간은 현대의 파리와 마르세유의 모습이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영화 속 사건에서 현재를 떠올리게끔 하는 것이다. 이를 과장되게 말하면, 영화가 난민 문제를 조명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끌어온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2015년 난민 사태로 대표되는 유럽의 난민 문제는 십 수년간 입에 오르내리는 유럽의 중요 과제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발표한 「2022 글로벌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약 1억 800만명이 집을 잃고 떠돌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전 세계 난민은 더욱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난민을 수용하는 유럽은 난민들의 무분별한 입국에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중 독일은 지난 10년 동안 난민 927만 명을 받아들인 나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했다. 난민 인정률도 23%에 달한다. 하지만 최근엔 입국하는 난민의 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자 수용을 자제하고 있다. 마치 <트랜짓>의 모든 등장인물처럼, 그들의 발버둥도 계속되는 것이다.

 

과거가 재현되고 있다. 시간의 구체성을 와해시킨 <트랜짓>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 그 경계를 재고시킨다. “물고기는 집에 가고, 코끼리도 쿵쿵대며 집에 가고, 개미도 서둘러 집에 가고, 등불이 켜지고 날이 저무네.” 영화에서 게오르그가 북아프리카 출신 꼬마 ‘드리스’에게 불러주는 노래다. 이 가사에서 ‘집’은 무엇을 뜻할까? 끝이 없는 배회에서 벗어나 고향을 떠올리는 마음일 수도 있다. 이주하게 될 새로운 정착지를 꿈꾸는 마음일 지도 모른다. 그럼 텍스트 밖의 상황을 바라보자. 북아프리카를 떠나 프랑스에 사는 그 꼬마에게 이 노래를 불러준다. 이후 게오르그가 꼬마를 떠나고 멕시코에 갈 채비를 하자, 꼬마의 가족은 정착지를 옮겼고 그 집에는 새로운 북아프리카 출신 대가족이 들어선다. 이 장면 자체에 영화의 주제가 담겨있다. 유령들의 발버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시 정부: 1940년 6월에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프랑스 중부 도시 ‘비시’에 세운 친독(親獨) 정권

[참고문헌] 윤종욱,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역사영화 - <바바라>와 <피닉스>를 중심으로』, 2018, 독일언어문학 제7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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