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미술제도 풍자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2019)이 ‘팔려야 완성되는 작품’, 아트페어를 풍자하기 위해 고안되어 아트페어에 출품된 작품이라는 해석을 살펴보았다. 카텔란은 사실 80년대 후반 데뷔 때부터 꾸준히 각종 미술 제도를 모방하며 풍자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오늘은 그중 대표적인 작업을 꼽아 소개하려고 한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미술 제도’란 미술관, 화랑, 미술사, 비평가, 큐레이터, 컬렉터 등 소위 ‘미술계’라 불리는 세계를 오랫동안 구성하고 움직여온 주요 기관 및 개인, 그리고 이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미술사학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에 따르면,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미술작품들이 미술의 여러 제도들(화랑이나 미술사, 미술 출판, 박물관 등) 내로 순환하면서 비로소 현대세계의 다른 어느 것보다도 상대적으로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고 그 가치가 증폭된다.”(1)

제도적 틀이 미술품의 가치뿐 아니라 정체성까지 정의할 만큼의 영향력을 끼친다는 말이다. 작품이 제작되고 전시되고 유통되는 과정에 굉장히 복잡한 제도적/경제적/정치적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을 ‘예술 작업을 통해’ 드러내려는 시도가 1960년대 후반 유럽과 미국에서 눈에 띄게 늘어났는데, 이런 경향을 미술사에서는 institutional critique이라 부르고, 한국어로는 ‘제도비판미술’이나 ‘제도비평미술’로 번역된다. 이와는 다른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1980년대 후반 등장하기 시작한 신세대 미술가들의 제도 비판은 비교적 냉소적이거나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띠기 때문에 후기제도비판(post-institutional critique)미술이라 불리고, 카텔란의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아래 소개할 카텔란의 미술 제도 풍자 활동에서 키워드는 모방과 인용이다. 십대 때부터 블루칼라 직업을 전전하다가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이 미술가로 데뷔하게 된 카텔란은, 초창기부터 아웃사이더 스탠스를 취하며 각종 미술 제도를 모방함으로써 풍자해왔다. 이때 미술기관뿐만 아니라 개념미술 역사에서의 대표작들을 기발하게 인용하여 신박한 개념미술 작업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카텔란의 특징이자 재능이다. 이 때문에 차용/전용(appropriation)의 개념/행위를 미술에 도입한 개념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에 자주 비교되는 것이다. 

 

전시인 듯 전시 아닌 전시 같은

1989년, 29세 신인 작가였던 카텔란은 볼로냐의 갤러리 네온(Galleria Neon)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갖게 됐다. 전시할만한 작품이 없다고 느낀 그가 택한 방식은, ‘전시회’는 열되 문을 잠그는 것. 요즘 말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열지 않았다. 전시 기간 내내 잠긴 문밖에 걸어둔 ‘Torno subito(잠시 외출중)’이라 쓴 푯말이 유일한 전시물 즉 ‘작품’이었으며, 거짓말이었고 방문객에게 헛된 희망만 줄 뿐이었다. 이 플렉시글라스로 만든 미니멀한 디자인의 오브제는 1960-70년대 제도비판미술에 투명한 플렉시글라스 박스를 자주 사용했던 한스 하케(Hans Haacke)와 후기미니멀리즘미술을 떠올린다. 전설적인 이브 클랭(Yves Klein)의 <Le Vide>(1958)가 텅 빈 전시장을 전시했다면, 카텔란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문 잠긴 전시장을 전시한 셈이다. 

 

도둑맞은 무형의 작품

1991년 밀라노의 루치아노 잉가-핀(Luciano Inga-Pin) 갤러리 그룹전에 초대받은 카텔란은 달랑 서류 한 장을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경찰서 직인이 찍힌 이 공문서는 실제로 카텔란이 경찰서에서 도난신고를 접수하고 발행받은 신고접수확인서로,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한 ‘무형(invisible)’의 작품을 개막 전날 밤 도둑맞았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준다.(2)

도둑맞았다는 물건이 무형이었다는 말은,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려내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눈에 안 보이는 물건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아무런 도둑질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문서는 카텔란이 경찰에 신고를 접수했다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서류만을 전시하는 행위는 60년대 중후반 각종 프린트물이나 텍스트를 작품처럼 전시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조세프 코수스(Joseph Kosuth), 로렌스 위너(Lawrence Weiner), 세스 시겔럽(Seth Siegelaub) 등 1세대 개념미술 선구자들을 인용하는 행위이다. 

 

도용의 예술 

카텔란은 실제 작품 절도 및 도용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그룹전에 참여하게 된 카텔란은 전시팀 직원들과 함께, 당시 근처 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던 네덜란드 작가 폴 드 루스(Paul de Reus)의 작품뿐만 아니라 갤러리사무실에 있던 물건들까지 테이프로 둘둘 싸매 빼돌리는 일이 있었다. 경찰에서 조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전시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카텔란은 이 해프닝에  <이것도 염병할 레디메이드(Another Fucking Readymade)>라는 제목을 붙여 작품화했다. ‘레디메이드’는 원래 기성품을 의미하던 단어인데 1910년대에 뒤샹이 변기, 자전거 바퀴 등 대량 생산된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제시할 때 사용한 이후, 이러한 제작방식이나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가리키는 미술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너무도 흔해지고 남발되는 차용/전용(appropriation)의 개념을 카텔란은 도둑질로 극대화시켜 실행에 옮김으로써 풍자한 것이다. 

 

게으른 예술가에게 주는 장학금

카텔란의 1992년작 <오블로모프 재단(Oblomov Foundation)>은 진짜 재단처럼 모금을 하여 장학금까지 만들었다. 100명의 후원자에게 100달러씩 기부 받아 총 만 달러를 마련한 카텔란은, 이 장학금을 받을 예술가에게 조건을 하나 달았다. 수상자는 일 년 동안 작품 전시를 하면 안 된다는 것! 전시를 하지 않으면 낙오되는 건데, 만 달러에 자신의 커리어를 ‘올-인’할 예술가가 어디 있을까? 결국 수령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 장학금은 카텔란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3)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100명의 기부자 이름을 새겨 넣은 유리판을 제작해서 밀라노의 브레라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di Brera) 건물 입면에 일 년 동안 걸어두었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 로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원자들의 명단 비(碑) 스타일 그대로 말이다. 이후 그는 이 기념비를 약 5cm 크기 조각들로 토막 내어, 마치 기념품이나 굿즈처럼 판매했다. 이 중, 한 옥션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조각 한 점은 거래 예상가가 최소 700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재단 이름 ‘오블로모프’는 이반 곤차로프의 소설 『오블로모프』(1859)에서 따온 것으로, 귀족 출신에 재능은 있지만 게으르고 무기력한 청년으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베니스비엔날레 전시장 임대 사건

<일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Working is a Bad Job)>는 카텔란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업의 제목이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어로 ‘2년마다’라는 뜻으로 2년마다 열리는 국제미술전을 일컫는데, 현재 지구상에 약 300개의 비엔날레 조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4)

1895년에 시작된 베니스비엔날레는 이런 형태의 전람회를 보급한, 가장 오래되고 공신력 있는 비엔날레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 행사로 손꼽힌다. 매회 수많은 미술전문가 및 애호가들이 미술의 최신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베니스를 찾는다.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전시할 중대한 기회를 얻은 카텔란은 신작을 만드는 대신 할당 받은 전시 공간을 한 광고회사에 임대를 줬고, 비엔날레 기간 내내 전시장에 놓인 전광판에서는 이 광고회사가 제작한 향수 광고가 전시됐다. 이렇게 큰 미술 행사에 유입될 수밖에 없는 상업주의, 즉 비엔날레와 자본 간의 관계를 꼬집어 들춰낸 작업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이 전시를 계기로 글로벌 스타작가가 된 카텔란은, 이후 여러 차례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작가로 초대받았다.    <일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는 최근 리움미술관에 전시되면서 미술관 로비에 CJ, 코오롱, 보테가 베네타 등의 기업이나 브랜드 광고를 걸었다. 비영리 기관인 미술관에 대형 광고가 걸릴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작품’, 이게 예술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비엔날레는 바캉스

카텔란은 직접 비엔날레도 만들었다. 90년대에 세계 여기저기서 비엔날레들이 생기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현상을 꼬집는 듯, 1999년 카텔란은 큐레이터 젠스 호프만(Jens Hoffmann)과 <제6회 캐리비언 비엔날레(6th Caribbean Biennial)>를 공동 기획했다. 단발성의 행사인데 뜬금없이 제6회라니. 이들은 실제 비엔날레를 꾸리듯 사무실도 차리고, 협찬도 받고, 보도자료도 배포했다. 참여작가는 총 10명으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 토피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등 당시 전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들을 휩쓸고 다니던 신진 대세 작가들로 확정됐는데, 이들은 정작 출품이나 전시를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8일 동안 서인도제도 세인트키츠 섬에 모여 수영하고, 파티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휴가를 즐겼다. 이런 구성은 여느 비엔날레 기간 중에 파티가 많이 열리는 점을 시사하기도 하고, 당시 미술계에 새로운 트랜드를 선도하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을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관계미학미술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티라바니자는 갤러리에서 카레를 요리해 관람객에게 대접하는 작업으로 호평을 받고 있었다. 

 

재주는 갤러리스트가 부린다 

카텔란은 상업갤러리 시스템도 놀이터로 삼았다. 그의 ‘갤러리스트 학대 3부작’(5)으로 불리는 퍼포먼스 작업은 갤러리스트들을 퍼포머이자 오브제(감상의 대상)로 등장시켜 작가-작품-화랑의 관계를 재편했다. 갤러리스트는 화랑에서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하고 소속작가들의 커리어를 관리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미술가들의 생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카텔란은 아직 신인이었던 1991년과 1993년, 각각 나폴리의 라우치/산타마리아(Raucci/Santamaria) 갤러리와 파리의 페로탕(Perrotin) 갤러리에서 전시할 기회가 오자, 해당 갤러리 오너들에게 놀이동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우스꽝스러운 인형 옷을 입히고 전시장에 돌아다니며 관람객을 맞이하도록 했다. 화랑 주인들이 자기 몸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호객행위를 하게 된 셈이다. 1999년 밀라노에서 갤러리 벽에 덕트테이프로 붙여져 ‘전시’되던 마시모 드 카를로(Massimo De Carlo)가 세 시간 후 병원에 실려 간 일도 있었다. <어느 완벽한 날(A Perfect Day)>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이후 사진으로 전시장에 걸리곤 한다. (덕트테이프로 벽에 붙이는 형식이 딱 10년 후 <코미디언>에서 다시 등장한다!) 2002년 카텔란, 알리 수보트닉(Ali Subotnick),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함께 뉴욕 맨해튼에 실제로 설립해 운영한 <틀린 갤러리(Wrong Gallery)>는 1평방미터 크기의 어마어마하게 작은 비영리 갤러리였다. 2005년 문을 닫게 되자 이 공간은 1:6 비율로 복제되어 2,500개 에디션의 조각품으로 판매되었다. 

 

글 없는 미술잡지

90년대 중반 출판업에도 뛰어든 카텔란은 이미지 기반의 잡지를 여럿 발행해왔다. 1996년부터 2007년까지 미술가 도미니크 곤잘레즈-포스터(Dominique Gonzalez-Foster), 파올라 만프린(Paola Manfrin)과 협업한 비정기 잡지 『퍼머먼트 푸드(Permanent Food)』는 이미 다른 잡지들에 출판된 이미지들을 모아, 마치 레디메이드 작품처럼 만들어졌다. 2001년 첫 선을 보인 『찰리(Charley)』는 수보트닉 및 지오니와 협업한 비정기 출판 시리즈로, 이 또한 다른 여러 시각출판물에서 가져온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기반으로 발행됐는데, 목적은 다양한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Charley #05』는 미술계에서 잊혀졌거나, 아웃사이더, 혹은 주목받지 못한 작가 100명의 작품 400점을 선정해 소개하였다. 또한, 2010년 카텔란은 드디어 사진가 피에르파올로 페라리(Pierpaolo Ferrari)와 함께 『토일렛페이퍼(TOILETPAPER)』를 창간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출판하는 작업을 하게 됐다. 『토일렛페이퍼』의 특징은 단순하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창작하는 것이며, 이 이미지들이 프린트된 인테리어소품과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숍도 운영하고 있다.

전례 없는 방식으로 미술 제도를 작업의 주제이자 재료로 삼아온 카텔란. 엉뚱한 침입자로서의 이미지는 2001년 자화상에도 자조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미술관 바닥을 뚫고 머리를 내밀고 있는 카텔란의 표정은 민망해하는 건지, 순진한 척 연기하려는 건지, 골똘히 엄청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읽어내기 어렵다. 다음 호에서는 카텔란의 조각 작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마우리치오 카텔란, '무제', 2001. 플래티넘 실리콘, 에폭시 유리섬유, 스테인리스 스틸, 머리카락, 옷, 가변크기.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사진: 김경태. 리움미술관 제공. 
마우리치오 카텔란, '무제', 2001. 플래티넘 실리콘, 에폭시 유리섬유, 스테인리스 스틸, 머리카락, 옷, 가변크기.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사진: 김경태. 리움미술관 제공. 

 

● 본고는 필자 이수진이 2023년 2월부터 7월까지 리움미술관에서 ‘다르게 보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1)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 1997, p. 28.

2) Diana Kamin, “Catalogue [1989-2016],” in Maurizio Cattelan: All exh. cat. (New York: Guggenheim Museum, 2016), p. 194.

3) William S. Smith, Ibid, p. 195.

4) Shwetal A Patel, Sunil Manghani, and Robert E. D’Souza, “Extracts from How to Biennale! (The Manual),” On Curating issue 39 (2019), https://www.on-curating.org/issue-39-reader/introduction.html

5) Nancy Spector, Maurizio Cattelan: All, p. 84.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