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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뭘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보희와 녹양'(2019)

때로는 목적지 없는 여행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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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희와 녹양'(2019)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보희와 녹양'(2019)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누구나 저마다의 고민을 품고 살아간다. 특히 한창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사소한 고민도 크게 다가올 것이다. 모두가 그 나이에 하는 고민은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라 하지만, 여기 한창 일생일대의 고민에 놓여있는 소년이 있다. 늘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이 열네 살  소년의 이름은 ‘보희’다.

보희는 어릴 적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미용실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문득 집에 이상하리만치 아버지의 흔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던 중, 어머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불쾌한 감정이 정확히 어떠한 감정인지도 모르는 보희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의 친구 ‘녹양’은 그런 보희가 마냥 재밌기만 하다. 어느 날 카메라를 든 녹양은 보희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한다. 기자는 녹양 대신 카메라를 들고 두 소년소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보희: 다 찍으면 뭐 하게.

녹양: 야, 꼭 뭘 해야 하냐?

 

괜히 어머니가 미웠던 보희는 아버지에 대한 단서 하나 없이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말이 여행이지, 사실 가출이나 다름없다. 녹양은 별말 없이 친구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역시나 말이 여행이지, 사실 지하철 말고는 탈 수 있는 게 없다.

▲보희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서울어린이대공원
▲보희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서울어린이대공원

어린이대공원은 보희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다.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자, 사촌 누나 ‘남희’를 처음 만난 곳이다. 기자는 어린 보희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왔던 어린이대공원 동물원으로 향했다. 평일 아침에 방문한 동물원은 어린이 관람객으로 가득 찼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신기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자니 기자 역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희에게도 이 동물원은 ‘가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희를 찾아가기 전 망설이던 보희 대신, 대담한 녹양이 통신사 직원인 척 전화를 걸어 남희의 주소를 받아낸다. 철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보희 앞에 나타난 건 험상궂게 생긴 얼굴, 남희의 남자친구 ‘성욱’이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성욱과 남희가 함께 사는 집에 들어간 보희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 가족과는 모두 연락이 끊긴 상태이지만,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그동안 제게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희는 더욱 큰 혼란을 겪는다.

 

보희: 나 아빠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충격에 빠진 보희는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녹양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계단을 오르고… 자신이 배우이며 보희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 칭하는 남자의 집에 무작정 찾아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얻은 아버지에 대한 단서라고는 아버지가 그림도 잘 그리고 사진도 잘 찍었다는 막연한 증언뿐이다.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남자의 집에 머무르던 보희와 녹양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쳐 나온다.

 

보희: 우리 아빠도 아까 그 아저씨 같을까?

녹양: 왜? 무서워서?

보희: 아니, 그냥 좀 슬퍼 보여서.

녹양: 어른들은 원래 다 그렇지 않나?

 

갈 곳 없던 보희는 성욱의 집에 머무른다. 정신없이 도망쳐 나온 집에서 얻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고, 다음 날 아침 한 대학 교수를 찾아간다. 아버지와 동명이인인 교수는 안타깝게도 제 아버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다시 한번 헛걸음을 한 보희와 녹양. 아버지에 대한 단서를 찾으면 연락을 주겠다던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힘없이 걸어 나온다.

 

성욱: 그런데 다큐 그런 거 찍어서 뭐 하려고?

녹양: 아저씨. 꼭 뭘 해야 돼요? 그냥 찾고 싶으니까 찾고, 찍고 싶으니까 찍고 그런 거지.

 

기분 전환도 할 겸 성욱이 일하는 바(bar)로 향한 보희와 녹양. 성욱은 내내 카메라를 들고 있던 녹양에게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다.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성욱을 쏘아보는 녹양. 사실 보희 역시 아버지를 찾으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그저 찾고 싶으니까 찾는 것이다.

▲옛 동양예술극장 앞
▲옛 동양예술극장 앞

어느 날 밤, 녹양은 보희를 두 사람이 종종 찾던 한 극장으로 끌고 간다. 익숙한 공간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녹양이 찾아낸 영화 한 편, 남자 주인공 이름이 보희고, 심지어 감독의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영화. 떨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하던 보희는 영화 속 등장하는 제 이름에 뭔지 모를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기자 역시 보희와 녹양이 향한 극장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두 소년소녀가 좋아하던 공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얼마 전 극장이 없어지고 큰 공연장이 생겼다는 소식에, 기자는 얼마간 목적지 없이 여행을 떠난 보희가 된 기분을 느꼈다.

 

녹양: 어? 오타쿠 아저씨 또 왔다. 오타쿠 아저씨가 감독인가 봐! 이제 어떡해? 가서 말 걸어?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온 보희와 녹양은 그동안 극장에 매일 드나들던 ‘영화 오타쿠’ 아저씨를 마주친다. 잘 봤다며 인사를 건네는 주위 사람들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녹양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보희에게 말한다. 매일 보던 아저씨가 이 영화의 감독이었다니.

기자는 보희와 녹양이 아저씨와 마주친 극장 앞 거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인적 드문 골목이기에 조용한 정적만이 감도는 곳. 그곳에서 제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마주친 보희. 보희 역시 이곳에서 한참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 내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보희는 이내 굳은 결심을 하고 아저씨, 아니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그렇게 보희는 상영 뒤풀이 중인 한 식당의 뒤편에 몸을 숨긴다.

 

보희: 안녕하세요, 저 보희입니다. ……아빠, 저 보희예요!

 

그동안 몇 번이고 연습했을 아버지와의 첫 마디를 연습하던 보희는 식당을 나서는 아버지를 마주친다. 뒷골목에 숨어 아버지를 따라가던 보희.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가려던 순간, 아버지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아버지를 다정하게 바라보다 꼭 끌어안고는 입 맞추는 남자. 그 광경에 눈을 크게 뜬 보희는 결국 연습하던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자리를 피하고 만다.

 

보희: 제가 보기 싫어서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와 가벼운 대화 하나 나누지 못하고 돌아온 보희는 꿈을 꾼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아버지에게 안기는 보희. 제가 보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며, 보희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말한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난 보희는 한강으로 향한다.

보희가 가만 앉아 있던 한강 공원이다. 멍한 얼굴로 가지런히 옷을 벗어둔 보희는 깊은 물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간다. 이 대목까지 읽은 독자라면 보희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강에 입수한 보희는 이내 관객의 눈앞에 등장해, 눈을 감고 편안한 얼굴로 수영한다.

▲잠원한강공원
▲잠원한강공원

기자 역시 보희가 앉아 있던 곳에서 가만히 한강을 바라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강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기자는 그곳에서 감히 보희의 마음을 가늠해 보았다. 아버지 역시 나름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 보희는 그날 밤 꾼 꿈을 끝으로 허탈함보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 역시 모두 해소된 채 가만히 한강을 유영한 보희는 그렇게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영을 마친 보희는 마침내 집으로 향했다.

이제 보희는 아버지가 궁금하지 않다. 어릴 적 녹양 덕분에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던 것처럼, 보희의 주위에는 여전히 녹양이 있고, 성욱도 있고, 남희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일을 맞이한 보희의 휴대전화에는 하나의 영상이 날아들어 온다. 영상의 정체는 긴 시간 녹양이 정성 들여 찍은 다큐멘터리 영상이었다. 제가 찍은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최연소로 칸(Cannes)에 가면 어떡하냐는 호들갑 섞인 녹양의 말이 무색하게, 그의 작품은 보희의 작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상영되고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여정이 수확 없이 끝났다 해도, 열심히 찍은 다큐멘터리를 제대로 상영해 보지 못하고 끝난다 해도. 때로는 목적 잃은 열정이 더 빛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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