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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ention! 『홍대신문』,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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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의 대동제, 좋지 아니한가?’ 제자가 건네준 『홍대신문』이 내게 물은 처음 질문이었다.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말을 되새기는 한편, 신문의 종잇장 소리를 즐기며 지면을 넘겨 보았다. 

교사인 내게 4면의 <시사파수꾼>은 집중할 수밖에 없는 기사였다. ‘채용은 감축, 정원은 동결?’이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교육 현장의 문제점을 다룬 대학 신문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교육이라는 내용적 측면에 더해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골몰하며 울부짖는 우리에게 『홍대신문』은 교육계가 나아가야 할 방면을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구조적 문제로 비추어 주었다. 그것은 또한 미래를 생각하는 청년이 충분히 가질 기회의 한 면이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청년들이 겪고 있는 상황의 애잔함을 공유할 수 있었고, 또 ‘학령인구 감소에는 교육비 감축이 아닌 과감한 교육투자 확대가 필요하다.’는 근원적 해결 방식은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홈페이지의 PDF 파일로 본 기사의 <역사교육 관련 전공 서적을 읽고 있는 고양이 ‘루아’> 도 눈에 띄었다. 그 익살스러움에 찌푸렸던 이맛살이 살짝 풀어지며 ‘피식’ 웃음을 띠게 됐다.

5면을 펴자 ‘죽음을 생각하는 청년들’이라는 무거운 제목이 마음을 한껏 눌러왔다. 무엇이 그들을 병들게 하는지 그 원인을 제시하는 기사 뒷부분에서 우울증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큰 원인은 그 사람이 겪어온 환경이라는 말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청년들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년기에 다다랐을까? 운이 좋게도 나는 직장 문제로 어린 자녀들을 미국에서 키울 기회가 있었다. 그 시절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너무나 진지한 태도로 YMCA나 보이스카우트 활동들을 하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회를 형성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에 그저 놀이처럼 보이는 활동마저도 진지하게 대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자라난다. 반면, 학원가를 맴도는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의미조차 모르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된다. 어쩌면 놀이 자체에서 즐거움이나 행복을 구하는 것은 사치가 되었고, 이제는 ‘뒤처짐 스트레스’라는 굴레에 억눌려 상위권이라는 가치만을 향해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해주었다.

7면의 ‘거울아 거울아, 내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줘’라는 기사는 제목부터 온갖 감각을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청동거울에서 시작해 현대의 실생활 속 거울의 활용, 나아가 거울의 심리적‧철학적 의미까지 다루고 있었다. 거울을 따라 인류의 역사가 함께 흘러 내려온 느낌을 주었고, 그 해석의 광범위함은 거울의 역사를 횡단하는 듯 했다. 기사를 읽으며 오늘 아침 출근길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왠지 그 거울은 같은 나의 모습도 괜찮아 보이게 만들어,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괜히 한 번씩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대며 아무도 없을 때 살짝 미소도 지어보게 만드는 그 거울. 우리는 그 거울처럼 나를 아름답게 평가해 주는 누군가를 찾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5면에서 읽었던 ‘죽음을 생각하는 청년들’이라는 기사가 오버랩되었다.

『홍대신문』이 전체적인 기사들의 내용 흐름을 기획했는지 모르겠지만 잘 기획된 구성을 보는 듯하였고, 대학 신문이라는 오브제(Objet)가 왠지 나의 감각을 한껏 일깨워 준 것 같다. 신문 한 부 건네준 제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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