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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붓질로 만들어진 한국 회화의 전설

박광진(회화54)동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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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진(회화54) 동문
▲박광진(회화54) 동문

미술관에서 회화 작품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마치 사진처럼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구상 회화는 도대체 어떻게 그렸는지 감탄할 수 밖에 없고, 첫인상이 단순해보이는 추상 회화는 작품 속 숨겨진 의미를 알고 나면 그림이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이 두 갈래의 회화에 모두 통달한 우리나라 서양화의 전설이 있다. 끝없는 노력으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낸 박광진(회화54)동문을 만나보자.

 

Q. 본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계기가 무엇인가?

A. 원래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양성하는 사범학교(현 교육대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무용과 미술, 체육을 배우면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가 하교한 후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그리는 그림을 구경한 경험 또한 서양화과 입학에 영향을 미쳤다. 사범대학 졸업 후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해야 했으나, 선생님이 되는 대신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뜻을 학교에 밝혔다. 이에 사범학교 교장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라고 했다. 그런데 국립대학교의 미술대학은 내가 원하는 분위기가 아닐 것 같아 이를 거절했다. 막연하게 사립학교인 본교에 진학하면 더 자유로울 것 같아 본교 미술대학 진학을 고집했다. 사범학교 교장은 결국 입학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지만, 본교 미대 학장이 나를 학교로 불러 “너, 아그리파 조각상 한번 그려봐라.”라고 했다. 그때 그린 그림을 보고 학장이 나를 합격시켜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Q. 사실주의 화풍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데, 그러한 화풍을 확립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또한 2000년대 이후 작품에서는 사실주의보다는 추상주의적 면모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화풍이 바뀌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A.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미술을 배운 사람들은 모두 구상 회화를 추구하는 화가들이었다. 해방 이후, 이 사람들이 서울대학교와 본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구상 화가였기에 추상을 그리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나도 그 영향으로 구상 회화를 배웠고, 그렇게 그려왔다. 2000년대 작품부터 화풍이 바뀐 이유는 추상 회화를 추구했던 선배 박서보(1931~)의 영향도 있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추상미술이 시대상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추상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구상 회화와 현대적인 추상 회화를 작품 안에서 서로 접목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Q. 1957년 목우회 창립회원, 2008년 한국예술원 미술분과 회원, 예술의 전당 이사 등 다양한 교류와 대외활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이 지금 어떤 의미로 동문에게 남아있는가?

A.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미술계 정책은 황무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나라 미술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서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노력 중 하나가 아르코 국제현대아트페어(이하 아르코 페어, Feria Internacional de Arte Contemporaneo)이다. 아르코 페어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익성이 높고 전세계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참여하는 미술계의 큰 행사 중 하나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인전을 진행하며 스페인 미술계 관계자들과 만났던 걸 바탕으로 5년간 아르코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위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한국을 참여국으로 만들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노력의 결실로 2007년 4월 '한국의 해'라는 제목으로 아트페어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개회식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스페인 국왕도 참석했었다. 한창 열심히 활동했던 때를 돌아보면, 내가 했던 노력들이 미술계 발전에 기여한 것 같아 뿌듯하다.

▲2007년 스페인 ARCO 아트페어 공식 로고/출처: e-flux
▲2007년 스페인 ARCO 아트페어 공식 로고/출처: e-flux

Q. 1965년부터 서울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를 역임 후, 명예교수로서 현재까지도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순수미술 교육 대신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교 교수가 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A. 본교 미대와 같은 순수미술을 가르치면, 내가 담당하는 학생들을 좋은 화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다. 하지만 교대는 선생님을 양성하는 곳이다 보니 예비 화가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사범학교를 다녔던 경험도 있어 그쪽이 친숙하기도 했다. 교대에서 교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대외활동을 모두 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내가 지금 위치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2019년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박광진_레트로: 1956-2005' 전시 포스터/출처: 뮤움
▲2019년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박광진_레트로: 1956-2005' 전시 포스터/출처: 뮤움

Q. <자연의 소리> 연작 등 동문의 작품들을 관찰하다보면 자연, 특히 제주도에 많은 애정이 드러난다. 자연과 제주도를 창작 소재로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A. 나는 서울 토박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다보니 서울을 벗어나 다른 곳에 가보고 싶었다. 이에 우리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시골 마을들을 찾아 다니며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학과 선배였던 박서보가 자기 작업실이 있는 안성에 오라고 제안했다. 과수원과 평원이 가득한 풍경에 반해 1983년 안성 반제리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동시에 매년 제주도를 여행하며 자연풍경을 그렸다. 제주도는 육지에선 볼 수 없는 오묘한 풍경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안성 작업실에 불이 났고, 안성은 점점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고 생각해 제주도 노형동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내가 제주도에 머무른다는 걸 들은 제주도 정치인이 저지 문화 예술인마을 창설 당시 정책 추진을 도와달라고 했고, 내가 1호 입주자가 되었다.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제주현대미술관 건립에도 참여했고, 그곳에 작품도 기증했다. 이후 김창열, 장민석 등 후배들도 하나둘 문화예술인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해 규모도 확장됐다. 특히 김창열은 자신의 이름을 딴 ‘김창열미술관’을 세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기증했다.

▲(위쪽부터)저지 예술인 마을, 제주현대미술관/출처: 비짓 제주
▲(위쪽부터)저지 예술인 마을, 제주현대미술관/출처: 비짓 제주

Q. 국내 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웨덴, 호주 등 해외에서도 전시회를 개최하며 활발한 교류를 진행해왔다. 이러한 교류를 추진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A. 처음 외국으로 나갔던 이유는 더 다양한 풍경을 그리고 싶어서였다. 외국 도시와 자연을 묘사했던 그림들이 해외에도 알려지면서 전시도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미술계의 수준을 높이고 더 넓은 세계로 진출하고자 해외 아티스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Q. 지난 7월, 본교 박물관에 작품 102점을 기증했다. 기증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하다.

A. 홍익대학교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지금의 화가 박광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본교에 고마움을 담아 기증을 결정했다. 예술가가 아무리 많은 작품을 만들어도, 죽을 때 그걸 들고갈 순 없다. 그러니 사회에 받은 만큼 돌려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증을 추진했다.

▲작업실 풍경
▲작업실 풍경

Q. 동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어떤 의미인가?

A. 체질에 가장 잘 맞는 일이다. 태생적으로 역마살이 있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국내외 여러곳을 돌아다니는 게 즐겁다. 하루종일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지루하지 않다. 이런 특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예술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의 한 마디 부탁드린다.

A. 좋은 그림, 훌륭한 예술을 하기 위해선 항상 치열하게 생각하고 연구해야 한다. 노력없이 어느날 실력이 늘길 바라선 안 된다. 밑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특히 추상 회화는 쉬워보이지만, 본인이 계속 새로운 것을 떠올리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풀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열심히 노력한 매일이 쌓이면 좋은 예술가로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다.

 

김진희 기자(cyril0330@g.hongik.ac.kr)

김혜빈 기자(sunbean@g.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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