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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회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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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끝내 해방된 조국의 하늘을 우러러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일제의 무도한 횡포에 27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식민지 청년 윤동주의 시 「서시」의 일부이다. 온통 ‘부끄러움’으로 채색되어 있는 그의 시집을 떠올릴 때면 늘 궁금해지곤 했다. 잎새에 이는 작은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그 어느 즐거운 날에도 참회록을 써야 할 만큼 그의 내면을 일렁이게 한 부끄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여름 접한 서이초 교사의 외로운 죽음, 그 이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또 다른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을 마주하면서부터 줄곧 내 속에서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이 소환되고 있다. 마치 ‘왕의 DNA’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DNA’를 물려받은 것처럼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아 돌면서 마음을 어지럽히곤 한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가해자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데, 나는 왜 이토록이나 부끄러울까?

성실하게 흘린 땀으로 가꾸어온 젊은 교사들의 꿈을 악몽으로 바꿔버리고 결국엔 그 삶들을 송두리째 파괴한 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타살임이 분명한 그들의 죽음이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교권추락’이니 ‘교권침해’니 하는 건조한 개념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속악한 민낯이다. ‘고문(拷問)’ 사회. 그 죽음들은 우리가 지금 새로운 유형의 고문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고문이 권력의 하수인, 소위 기술자들에 의해 골방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면, 민주화된 오늘날의 고문은 평범한 이웃들에 의해 일상 속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 광범위하고 다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갑질’이 신종 고문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과거의 고문과 현재의 고문, 그것이 구현되는 외양은 달라도 피해자의 영혼과 육체를 무너뜨리고 삶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다. 젊은 교사들의 죽음이 밝혀준 진실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대학살에 가담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철학적 의문을 품는다. 지극히 평범한 이웃 같은 개인 아이히만은 어떻게 아무런 양심의 동요도 없이 그토록 성실하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찾은 답은 성찰적 사유의 부재이다. 이는 곧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 주변엔 그 같은 ‘작은 아이히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윤동주의 부끄러움, 그의 자기 성찰적 태도가 그리운가 보다.

나의 부끄러움은 나 역시 ‘작은 아이히만’들이 버젓이 횡행하는 세상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그렇게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여 나는 우선 어른들이 만든 저열한 세상에 던져져 악몽에 시달리며 고투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머리 숙여 깊이 사죄한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그래도 우리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청춘의 여행은 길이 끝난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이 청춘의 숙명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청춘이 포기하면 세상은 더욱 고약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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