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살아라, 그대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래부터 그리 넘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기자는 요즘 뉴스 탭을 켤 때마다 인류애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온갖 부조리와 악은 분노를 넘어 무력감을 선사한다. 그러다보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날 지경에 도달한다. 여러 사람의 인격을 짓밟은 잔혹한 범죄에 비해 솜방망이인 처벌이라던가,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닌 본인을 위한 정부라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동을 선의로 포장한 채 지옥 같은 풍경이 펼쳐져도 모르는 척하는 내용의 기사는 하루에도 수천 개씩 쏟아져 나온다. 기자는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위의 예시와 맞는 뉴스를 찾다 세상에 대한 염증만 하나 더 얻었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라는 한 등장인물의 무시무시한 대사에 공감한 것은 덤이다.

기자는 이 감정의 도피처로 상상 속 세계를 택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과 만화 속 악당은 매력적이며, 그가 행하는 악은 치명적이지만 낭만적이고 즐거운 것이다. 오히려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진부하며 재미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런 기분은 비단 기자만 느끼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매력적인 악당 순위’라던가 ‘악당 모음’이라는 제목의 영상이나 글 모음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떠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우리가 악당에 열광하고 있음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악에 열광하는 우리는 천성부터 악한 존재인가? 인류가 ‘탐구’라는 걸 시작한 때부터 이 주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맹자(孟子, B.C. 372~B.C. 289)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근대 시기 철학자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또한 인간의 자연 상태는 우정과 조화가 지배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이 자연 상태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순자(荀子, B.C. 298~B.C. 238)는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人爲)다.” 라고 말했으며,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있다고 했다. 명확한 결론은 아직까지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이 두 방향 모두를 좇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선악이 어느 공간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변한다. 현실과 달리 허구 속의 악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잔인하거나 염세적인 작품을 봐도 책을 덮거나 화면을 꺼버리면 끝이다. 그날 밤에 조금 무서움을 느끼고 엄마를 찾거나 나쁜 꿈을 꿀 수는 있지만.

반대로 상상 속에서 지루하다고 치부했던 선은 현실 속에서 환하게 빛난다. 1년 전 이즈음 인파에 끼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가게 문을 연 상인들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 지켜줄 법이 없어 자식을 떠나보낸 채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님의 이야기는 아름답다는 단어 말고는 묘사할 방법이 없다. 지붕 없는 감옥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알리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전쟁통에 뛰어드는 기자들, 이미 많이 다치고 깨졌음에도 굴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매혹적이며, 눈물이 날 정도로 찬란하다. 이 눈물은 선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상 속의 악은 낭만적이고도 다양하나, 실제의 악은 우울하고 단조로우며 척박하고도 지루하다. 상상 속의 선은 지루하지만, 실제의 선은 언제나 새롭고 놀라우면서 매혹적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가 남긴 말이다. 살아온 매 순간을 선으로 채웠는지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기로 하자. 인간의 마음속엔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선이다. 그래서 기자는 우리의 모든 하루가 선으로 향하는 길목이라고 믿는다. 어떤 형태이던지 간에 선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모든 행위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환상적이다. 그러니 그대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추하다고 모욕할 수 없으며, 진부하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기자는 감히 부탁해 본다.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니 그 모습으로 남아달라고.

그러니까, 그대는 살아라.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