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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홍대 학ㆍ예술상(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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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최우수상 신윤아(회화4) 

 「물 먹은 고백」 

 

우수상 이정훈(산업‧데이터4)

「Goodbye Seoul」 

 

우수상 정예림(회화4)

「돌려주세요 천사님」 

 

최우수

 「물 먹은 고백」 

1.

형윤은 병상에 누워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의 발걸음이었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 몸통 한 번 뒤집을 수 없었다. 덥지도 않은데 괜히 땀이 흘렀다.

성준은 빠르게 걷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가 뭔가에 서두르는 모습 자체를 그다지 본 일이 없었다. 어디서 무얼 하든 그는 예정된 시간보다 수십 분은 일찍 도착해서 제일 천천히 자리를 뜨곤 했다.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발밑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났다. 보폭 하나하나가 일정하지도 않았다. 조금이라도 느리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한 발짝 뗄 때마다 마음속으로 천천히 초를 세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복도에 올리던 소리가 멎자 이윽고 병실 문이 열렸다. 형윤은 눈을 감았다. 어떤 변명을 하고,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지 셈을 잘 해둬야 했다. 그러나 성준은 머릿속이 제대로 채 정리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이런 말 꺼내기 좋은 상황이 아니란 건 아는데요. 저도 제 입장이란 게 있어서요. 사실 고소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래서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더라고요.”

움직이지 못하도록 깁스로 단단히 고정된 목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성준이 무슨 얼굴로 이런 말을 자신에게 늘어놓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장이라도 미칠 지경이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는 진짜, 이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거든요?”

“원래 봉변당한 사람은 처음엔 상황 파악이 잘 안 돼요. 할 일 알려줄게요. 그냥 경찰에 연락해요.”

“왜 대답을 안 하고 순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거예요?” 

줄곧 감정을 억눌러왔던 듯 터져 나온 그의 말끝이 꽤 날카로웠다.

“정말로 내가 사기꾼일 수도 있다고 생각 안 해봤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형윤은 몇 시간째 보는 건지 모를 얼룩덜룩한 회백색 병실 천장을 노려보았다. 다친 건 분명 척추에 팔다리일 텐데, 이래서야 눈까지 먼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프고 막막한 것보다도 닥쳐오는 답답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전혀요.”

“뭐 괜찮은 근거라도 있었어요?”

“발소리가, 그러니까, 발걸음이 똑같아서요.”

사기 근절 캠페인 담당 공무원이 들었다간 대성통곡을 할만한 소리였다. 형윤은 평생 크게 생각도 해본 적 없던 자신의 걸음걸이를 떠올려 보려 했다. 내가 그 애처럼 걷는다고?

“정말로 똑같았다고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말이에요.” 

곧 형윤은 생각했다. 뭔진 몰라도 그의 생각이 맞았으리라.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 둘 다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라곤 없을 때까지 달려왔다.  그러니 여기까지 와서도 확언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분명 진심일 테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건 형윤이었다. 우스울 정도로 억척스러운 상황 정리의 시작이었다. 성준은 생각했다. 어떤 얘기가 나오나 한번 보자고.

 

 

 

 

2.

성준의 존재를 알기도 전의 일이었다. 당시의 그녀는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 렌즈 한 알조차 꼴 보기 싫었다. 온갖 첨단 기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런 것들과 큰 관계 하나 없었던 그녀가 팔자에도 없던 로봇 범죄에 엮여버린 것이다. 와중에 그녀는 그런 머리 아픈 일을 무시하고 넘기기에 다소 예민하기까지 했다.

한 때 형윤은 혼자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사람이 없는 시간에 동네 뒷산에 등산 나가는 걸 좋아했다. 친구들과 종일 어울려 놀다 새벽 늦게야 집에 들어오고 하는 생활을 즐겼던 것도 같았다.

중요한 건 당시엔 조금도 그렇지 않았단 점이었다. 마땅한 상황 개선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방음도 썩 안 되는 집에 틀어박혀 복도에 오가는 발소리만 들으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것. 그녀의 삶은 딱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체된 공기는 방구석에 고인 채 날이 갈수록 썩은 내를 물씬 풍겼다.

형윤은 자신의 삶이 망가진 것이 그 인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끔찍한 인간. 조금 자기 취향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 개인 정보를 긁어다 웬 인공 살점 덩어리를 만들어다 데리고 산 미친놈. 당시로부터 1년 전,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녀의 대학 선배가 충분한 본인의 정보 제공 동의 절차 없이 유사 인간 등급의 로봇을 만든 죄로 감옥에 간 일이 있었다. 그녀는 총 4명 있던 피해자 중 하나였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지만 1년 내외란 시간은 오히려 또 길다면 길기도 했다. 적어도 자괴감이 싹트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다.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스스로가 이상한 건 아닐지 하는 괴상한 발상이 머릿속을 빈틈없이 채워 놓고 있었다. 과연 엄밀히 내 삶이 그놈 때문에 망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이전에도 자신의 삶은 그다지 찬란하지 못했다. 조금만 비교해 보면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자신이 무너진 것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생각이 도무지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어땠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데 뭘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은 그저 그 일을 빌미로 끝없이 보잘것없이 무너진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상담사 앞에서 아무 소리나 늘어놓는다고 해결될 의문도 아닌 것 같았다. 우울함이 무뎌진다고 정답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형윤은 그렇게 방구석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긁어냈다. 그녀는 바닥도 모르고 부스럼을 냈다.

그러다 보면 이따금 형윤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같은 이름을 가진 그녀.

같은 키에 자신이 가장 말랐을 즈음의 체중, 한때 좋아하던 하늘하늘한 패션 취향, 애매한 시력. 자잘한 습관 등, 실제로 자신을 빼다 박은 그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별 특별할 것도 없이 경찰서에서였다. 형윤은 한참이나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뭔 일을 그리 많이 한 건지 손끝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이 로봇이 그럼 저, 선배 집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거죠?”

“네, 충분한 동의와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기체라서요. 폐기 희망하시면 여기 서류 작성해 주시면 되세요.”

“저 인간이 저런 걸 몇 개씩 만들어서 데리고 있었다고요?”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는 형윤 씨까지 네 명입니다.”

“유사 인간 등급 수준의 로봇이면 초기에 용도 세팅인가 뭔가 하지 않나? 뭐였어요?

“잠시만요.”

담당 형사는 파일에서 잠시 종이 몇 장을 들춰 넘겼다.

“아, 보모 로봇으로 세팅되어 있네요.”

형윤은 잠시나마 상대를 언니, 언니 하고 따르던 이십 대 초반의 자신을 떠올려 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명확하게 떠올릴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머리에 바늘 묶음을 가져다 꾹꾹 꽂아 넣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생각의 방향을 꺾고자 시선을 돌렸다. 폐기 신청 서류에 손을 뻗어 각 항목을 눈으로 대강 읽어 내려갔다. 대충 알만한 내용의 연속이었다.

형윤은 빨리 해치우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펜을 집어 드는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가볍게 숨을 내쉬며 동의 서명을 하고자 촉 끝을 종이에 가져다 대는 것까지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손은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바람에선지 형윤은 아까 전 마주쳤던 문제의 보모 로봇을, 정확히는 그녀의 손끝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리자 건너편 벽 근처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핀으로 올려 집은 머리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지저분하게 가닥가닥 빠져나와 있었다. 그것 외엔 제법 멀끔한 차림새였다. 대충 봐도 옷가지 한 벌 구겨 입지 않아 버릇한 듯한 행색의 그녀는 이 정도 거리에서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형윤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에 걸쳐진, 군데군데 구김이 진 까만 반팔 티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본떠 만들어졌을까? 정말로?

형윤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 하나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제가 폐기 동의 안 하면 저 로봇은 보모 로봇 고객 매칭 뭐...그런 데로 가는 거죠?”

“에? 아 그건 그런데요. 폐기 안 하시게요?”

“믿을만한 곳으로 가나요?”

“매뉴얼이 그렇게 되어있어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데로 갈 거예요. 충분히 검증받은 곳이긴 한데......”

“그러면 그렇게 해주세요.” 

“괜찮으시겠어요?”

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세요. 아, 그나저나 형사님.”

“네?”

형윤은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저거 나이도 먹나요?”

“나이요? 노화 말씀하시는 거라면 일어나도록 설계된 걸로 확인됐어요.”

“그림, 저 로봇이랑 나 중에 누가 더 나이들이 보여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던 경찰은 이내 잘 모르겠다는 예의상의 답변을 뱉곤 자리를 떴다. 곧 귀가해도 좋다는 안내를 받은 형윤은 무언가 다짐이라도 한 듯이 대기 중이던 그녀에게 연락처를 적어주고, 개인 번호가 생기거든 이 번호로 메시지 한 통 남겨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1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게 다였다. 그 이상 형윤이 그녀를 마주할 일은 없었다.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야말로 반드시 벌어지기 마련이다. 먼저 연락을 취해온 것은 형윤이 아닌 로봇 쪽이었다. 수년이나 지나서였다. 형윤은 반쯤 잊고 살고 있던 그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누굴 닮은 건진 몰라도 용건 한번 간단했다.

“만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예요? 그쪽으로 갈게요. 오늘 중에 시간 되시나요?”

 그렇게 사람 한 명, 로봇 한 명이 수년 만의 연락 한 통만으로 반나절 안에 집 근처 골목 커피숍에서 어색한 만남을 갖게 되었다. 여전히 마땅한 직업 없이 방구석에 시간이나 죽이던 형윤은 간만에 거울을 보며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내려야 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왜 연락한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도망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좀 알아듣게 말할 수 없어요?”

간만에 만난 로봇의 손끝은 여전히 헐어 있었다. 곳곳에 박힌 굳은살 역시 그대로였다. 분명 자신과 똑같이 나이를 먹었을 텐데 어째선지 훨씬 앳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가 형윤은 서먹하지만 했다.

복잡한 감상에 빠져있던 형윤에게 그녀는 이내 불친절한 데다 불편하기까지 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더 이상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인간이랑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싶지 않아요.”

 

 

 

 

3.

성준이 형윤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건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였다. 그의 부모는 로봇 보모에 대한 만족스런 후기를 학부모 커뮤니티에서 열 개 정도 내리읽고는 큰 고민 없이 로봇 보모 매치 플랫폼에 글을 올렸다. 그렇게 성준은 어느 날 아침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보모를 갑작스럽게 소개받았다. 난데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 이후 형윤은 성준이 원하는 거의 모든 순간 그와 함께했다. 당시 성준은 이제 막 열세 살이 되는 생일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보모의 존재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부모님이 결정하는 것이니 자신은 아무래도 좋다고 판단한 쪽에 가까웠다. 이따금 의문을 품기는 했다. 자신의 보모가 처음 봤을 때 상상하던 것보다 조금 더 체온이 높았던 것이다. 이런 로봇을 만드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연유가 있어서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조절하는 걸까, 싶었다.

로봇 보모가 유행하기 시작한 건 당시로부터 약 2년 전이었다. 인간과 거의 유사하여 어색한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고, 기대에 반하는 행위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는 모범적인 피고용인.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이의 인간적이며 정서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기 위한 기능을 적절히 탑재하고 있었다.

총체적으로 고객의 니즈에 나쁘지 않게 부합하는 상품군이었다. 전반적인 평도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뉴스를 탄 뒤 학부모 커뮤니티에서 한 바퀴 유행했고, 이후 자잘한 사회적인 문제 몇 가지가 벌어졌다가 사그라들었다. 한동안 구설에 올랐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대충 모든 게 아무래도 좋아질 때쯤, 더 이상 그들은 그다지 신기해할 것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준과 그의 가족에게 또한 마찬가지였다.

형윤은 그 이후로 큰 문제 하나 일으키지 않고 성준과 함께했고, 그 느닷없는 첫 만남으로부터 5년 정도 지난 어느 여름에 사라졌다. 어느 날 아침 성준이 눈을 뜨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어 외출했나 싶었지만 오랫동안 보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그녀를 찾고자 온갖 추적 서비스에 문의했지만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무슨 수를 써도 실마리 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성준도, 그의 부모도 거의 포기하고 있던 그녀는 느닷없이 사라진 만큼 갑작스럽게 다시 나타났다. 동네 한복판, 피곤한 인근 직장인들이 오가는 평범한 약국 앞에서였다. 성준은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달려가 형윤을 붙잡았다. 시간 되면 잠깐 카페에서 얘기를 좀 나누고 싶다는 그의 말에 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뒤, 형윤은 다시 아무 일 없던 듯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왜 사라진 거냐, 어디로 갔던 것이냐, 어째서 그렇게 찾아내기 어려웠던 것이냐,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성준은 그 어떤 질문도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대신 성준은 명확하게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처음에 서명한 계약서에 따르면 온갖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모 로봇의 책임을 중지하는 조건 규정 중 해당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요구란 그녀가 돌아와 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형윤은 거기에 응했다. 그녀는 더없이 간단하게 다시 한번 성준의 보모가 됐다.

이 별 볼 일 없는 재회도 어느덧 5년 전이었다. 성준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부모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고, 약 1년 뒤 출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성준의 말투며 모습에 더 이상 어린애의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 외에 형윤의 삶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별 탈 없게 지나가는 하루하루였다. 하루는 뻔하게 시작됐고, 비슷한 할 일을 해야 했으며,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아무 일 없던 날들이 돌연 내려앉은 건 이틀 전이었다. 냉장고에 찬거리가 떨어진 것을 본 형윤은 평소와 다름없이 장을 보기 위해 집 밖에 나섰다. 전날 내린 비와 유난히 차가웠던 아침 공기 탓에 늘 다니던 언덕배기가 유난히 미끄러웠고, 짐을 들고 있던 형윤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지나가던 주민에게 발견되어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성준은 이 모든 것이 질 나쁜 장난 전화나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수화기 너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아니, 수리 센터도 아니고 병원은 무슨 병원이야, 보모가. 성준은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커피를 두어 모금 넘겼다. 그 턱도 없는 연락이 누군가의 장난도, 사기 전화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하루가 다 지나가고야 알았다. 성준은 전화가 왔던 연락처를 검색해 보고, 자신의 부모와 한참이나 통화를 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안내 데스크에 병원에 챙겨온 로봇 보모 계약서를 제출한 뒤 전송받은 형윤의 약식 의료 정보는 명백하게 그녀가 로봇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서류를 잘 접어 가방에 넣었다.

“119 신고해 주신 분께서 선생님 댁에서 일하는 분이라고 하셔서 연락드렸거든요. 환자분 가족과 마땅히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요.”

“아, 그러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준은 도망치듯 병원을 나섰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자동차에 시동부터 걸었다. 마침 걸려 온 전화를 받자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성준아, 오늘 회사에서 말한 거 어떻게 됐어? 진짜야? 너네 이모. 그. 형윤 씨였나? 그 보모 로봇이 사람이었다고?”

“어.”

“대체 언제부터? 너 어렸을 때 아버님께서 그분 뭐 사기 이런 거 아닌 거 여기저기 다 돌아다니면서 검사 싹 받지 않으셨나?”

“5년 전에 다시 만난 게 이모가 아니었나 봐.”

“아, 이게 참, 아니.....너 괜찮냐?”

“몰라. 정말 그냥 물어보는 건데, 고소해야겠지?”

“그거 지금 질문이라고 한 거야?”

차량 앞 유리에 어느덧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이퍼를 켜자 애매한 컨디션의 중고차가 조금 어색한 움직임으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응, 정말 질문이야.”

성준이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의 보모뿐이었다. 물론 죽이려는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자신을 툭하면 괴롭히던 한 학년 위 선배가 있었다. 그 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당시 성준이 살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않은, CCTV가 거의 없는 골목까지 찾아왔다. 녀석에게 발길질당하던 중, 도망치기 위해 그를 밀친 것이 우연히 사고로 번졌다. 마침 바로 옆에 있던 아찔하리만치 가파른 계단에서 그는 살벌하게 굴러떨어졌다.

겁에 질린 성준은 집으로 달려가 울면서 자신의 보모를 찾았다. 늦여름이었지만 오전에 비가 쏟아진 탓에 끔찍할 정도로 습했다. 그는 보모와 함께 최선을 다해 현장을 정리했다.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한 범행이었지만 괴상한 행운이 겹치며 그 선배는 결국 실종 처리되었다. 성준은 몇 번 정도 경찰서에 진술하러 가야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가 학교에서 꽤 심한 강도의 따돌림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것은 그의 보모뿐이었다. 그녀는 성준의 요구에 따라 그 사실을 그의 부모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은 걸로도 모자라 고작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자신의 고용주가 멀쩡한 아들 노릇을 하는 일련의 과정의 최선을 다해 도왔다. 오로지 성준이 원했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표면적으로나마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성준이 그녀를 가깝게 여겼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울적하고 무기력해서 누군가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순간마다 자신의 방에 찾아와 간식거리를 놓아주던 그녀가 좋았다. 모든 게 틀어질 대로 틀어진 지금까지도 그는 학생 시절의 기분을 제법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그는 보모가 자신의 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마침 오늘도 딱 애매한 정도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성준은 차창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통화 너머로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친구의 음성이 멀게 느껴졌다. 성준은 숨을 골랐다. 당장 현재의 무언가에라도 집중해 보기 위해 괜히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성준아. 암만 내가 널 하루 이를 본 게 아니라지만 좀 알아듣게 말하면 안되겠냐. 발걸음 때문에 의심을 안 했다는 게 말이 돼? 혹시 뭐, 은유? 그런 거 하고 있는데 내가 못 알아듣는 거냐, 내가?”

“장난하는 거 아냐.”

“제발 정신 차려. 차라리 술을 한잔하자고 하든가. 너 괜찮아? 병원 어딘데.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니야, 됐어. 나도 생각 정리를 좀 해야지.”

유난히 밤 도로가 한산했다. 성준은 차를 돌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보다 병원으로부터 멀리까지 나와 있었다.

“야, 네가 뭔 생각하는진 모르겠는데, 꼭 고소해. 일자리 구하기 힘드니까 로봇으로 속이고 취직하는 놈들 이거 다 잡아들이는 게 맞아. 세상이 이러면 누가 뭘 믿고 살겠냐고. 또 혼란스럽다고 넘어가지 말고......” 

“잘 처신해 볼게.”

성준은 전화를 끊었다. 상황을 마땅히 이해하지도 못한 현재 상황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으랴.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병원까지는 내비게이션 기준으로 15분 정도는 더 달려야 했다. 성준은 적어도 병실 문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5년 전에 만난, 계약에 묶여 돌아온 보모.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던 바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곱슬기가 있는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셔츠 자락에 구김이라도 조금 가 있다 싶으면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한 머리카락은 윤기 한 줌 없이 버석거렸고, 애매하게 목이 늘어난 티셔츠는 나무랄 것까지는 없어도 확실히 그녀답지 않았다. 그런 형윤을 본 성준이 제일 먼저 한 생각은 그녀를 이렇게라도 찾아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느낀 것은 다름 아닌 당혹감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앞으로도 자신의 삶에서 퇴장하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그는 형윤이 계속 자신의 보모 로봇으로 남았으면 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벌여서 해내지 않아도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편하다. 형윤이 수상할 정도로 큰 고민 없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와 지내라는 자신의 요구에 응했을 때도 그는 그 이상의 어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 하러 더 의심하고, 고민을 해서 혼자 힘들어한단 말인가.

그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성준은 그 이후로 지나간 5년 내내 형윤과의 관계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했다. 평생 이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으면 했다. 보모와 관련된 그 어떤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을 때까지.

 

 

 

 

4.

“걔가 왜 도망친 거냐고요? 싫었나보죠. 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 애는 당신의 허락 없이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잖아요. 보모 로봇은 편하니까 한번 데려와서 평생 끼고 사는 사람도 많은 판인데. 어차피 도망쳐야 할 텐데 생각보다 주인이 어린 것 같아서, 저는 관두더라도 어른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요. 근데 싫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바로 도와줬어요. 추적 피할 방법은 내가 친구한테 물어서 알아봤고. 그런 쪽에 일하는 아는 애가 있어서.”

“그럼, 당신은 그걸 다 알고도 가만히 있었단 거예요?”

“가정에서 근무하는 정식 등록 로봇이 그 정도 생각을 했으면 오작동이긴 하죠. 그쵸, 오작동이 맞아요. 하지만 아까 걔가 왜 만들어졌는지 얘기했잖아요.”

형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이 맞는다면 자신은 이미 완치 판정을 세 번은 받아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도 조금도 헤어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여전히 무언가 뜨겁게 끓는듯한 기분이 목구멍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것이 끔찍했다. 여전히 띵하게 울려오는 자신의 예민한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최대한 차분하게, 또박또박 할 말을 이어갔다.

“내 옛날 학교 선배, 그 미친놈이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별로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그 인간, 그 짓을 외로워서 벌였대요. 생각해 봐요. 그런 게 계기면 사람같이 만들어야지 뭣 하러 다르게 만들어요? 저 말고 다른 피해자들은 자기 본뜬 로봇이랑 말 몇 마디 섞자마자 징그럽다고 전부 폐기 처분 신청해 버렸다고요.”

“......”

“여태 온갖 미친놈들이랑만 지내면서 어떻게든 맨정신으로 지 할 일 해 온 애잖아요. 엄청 친한 것도 아니었지만 좀 불쌍했어요. 한 지붕 아래에 또 범죄자 수발들고 살기 싫어서 미쳐버리겠다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막아요.”

“그럼, 저는요?”

“당신과 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당신 생각을 왜 해요?”

“그럼, 나한텐 왜 왔어요? 왜 나랑 지금껏 5년이나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 건데요?”

목이 메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오라는 말은 안 나오고 웬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몇 시간이 가는지, 몇 날이 가는지, 지금 내가 얼마나 웃고 얼마나 웃었는지, 1분 전의 것도 1년 전의 것도 잘 기억나지 않던 시기가 떠올랐다. 그때는 많이 울었던 것 같은데.

“머릿속이 복잡해서요.”

성준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보모의 숨죽인 발소리, 손길,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네는 소리, 가지런하게 묶은 머리카락. 보모는 대체로 무표정했고, 큰 변화가 없는 그녀의 얼굴을 성준은 그다지 유심히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자잘한 습관을 기다렸다. 역시 발걸음이 문제였다. 오늘 이날까지 무얼 기다려 온 걸까.

“나는, 나는 걔가 도망칠 수 있었으면 했어요. 저는 걔가 뭘 어쩌든 늘 무력했고, 무기력했거든요. 정말 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그 애가 도와달라고 연락하던 그날까지도요. 웃긴 게 뭔지 알아요? 갑자기 걔가 부럽더라고요. 그도 그럴 게, 난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는데 걘 그 먼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오잖아요. 당시 우리 집은 당신 집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형윤은 더 이상  가눌 수 없는 목으로 말했다.

“그날은 유난히 두통약을 좀 멀리 사리 가고 싶었어요. 머리는 아주 아팠는데, 어쨌든.”

성준은 따갑도록 두 눈을 뜨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병실을 채우는 백색소음 위에 딱 2인분의 숨소리가 감돌았다. 형윤은 닦지도 못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에 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라 녹아내렸고, 무겁게 내려앉은 머리만큼이나 끔찍한 눈물이 흘렀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조용했다.

 

최우수 당선 소감

 

신윤아(회화4)  

먼저 정성스레 심사해 주셨을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진 다방면의 미숙함을 스스로 억척스레 기워내어 쓴 글이었습니다. 이토록 거친 글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면 그것만으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심각한 일이든, 별것 아닌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다 보면 결국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한 것도 나중에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질 뿐입니다. 이 복잡함을 글로 만족스럽게 담아내고 싶었고, 자신만의 마땅한 방법을 찾아내기가 무엇보다도 어려웠습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2년 정도를 고민한 끝에 한 건 벌여보자는 마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여전히 문장 한 줄을 적는 것도, 그걸 긁어모아 한 편의 소설을 만드는 것도 어렵기만 합니다. 뚜렷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썩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든 지나고 보면 나쁘지만은 않기 마련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괜찮으니 소설 계속 써보라'는 말로 몇 번이고 부추겨 준, 사랑하는 엄마께 한없는 감사를 표합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수

「Goodbye Seoul」 

“수영 씨 안 와요?”

“아? 아니에요, 갈게요”

벌써 네 번째였다. 함께 왔던 곳만 오면 길에 서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8년이란 시간은 쉽게 버려질 시간이 아니었다. 현남과 헤어지고 나서 한 달 정도 뒤에 은서 언니가 소개팅을 잡아줬고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사람을 사람으로 잊으라는 말을 믿었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었다. 그게 정답이었다면 오늘 낙산공원을 오르다 멈춰설 일도 없었을 거였다. 현남이 고백하기 전, 그러니까 연인이 되기 전 아직은 친구 사이로 함께 왔던 곳이 혜화였다. 함께 밥을 먹기로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현남이 나에게 마음이 있는줄은 몰랐다. 회계 원리 시험 족보를 빌려줬고 거기에 대한 고마움으로 현남이 먼저 밥을 사주겠다 제안했다. 그 장소가 혜화였다. 끌어안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접시에 나오는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나와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생각하면 불편함이 먼저 떠오른다. 학교에서 수업을 같이 듣고 동기들이랑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먹어왔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불편함 때문에 속은 더부룩했고 소화제라도 사서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마로니에 공원을 걷고 또 대학로의 깊숙한 곳을 향해 걸으니 조금은 속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식당의 웨이팅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음에도 연우소극장이 있는 골목까지 걸어왔을때 펼쳐진 하늘은 푸르렀다. 봄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나중에 현남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 본인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고, 불편했다고 했다. 그리고 연우소극장 쪽으로 향한 건 의도한 거라고 했다. 그곳에서 공연이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일반 상업 연극과는 거리가 있지만 분명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남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직도 나는 그때 본 연극을 잊지 못한다. 대사를 두어 번 버벅거리던 젊은 배우, 소극장이 떠나갈 듯한 발성으로 대사를 읊던 나이 지긋한 배우, 어두운 소극장에서 손을 잡진 않았지만 가끔 부딪히는 몸 때문에 조금씩 움직이던 느낌. 공연이 끝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치는 박수 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던 느낌. 모두 선명히 기억난다. 그 선명한 기억 때문인지 소극장을 나와 낙산공원을 걷던 때마저도 선명하다.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빛깔이 꼭 딸기우유 같아서 마음이 말랑거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현남은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조금 더 걸었다. 골목을 따라 혜화역으로 향하다가 출구를 지나치고 이제 막 녹색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뛰어 건넜다. 보폭이 비슷해 속도가 같았다. 길의 끝이 없는 듯 걷다 보니 낙산 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나왔다.

성곽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나와 현남은 숨이 차 한동안 대화를 하지 못한 채 성곽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현남이 멈춰 섰다. 나는 잠깐 쉬자는 의미인 줄 알고 가쁜 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 달보다 밝은 것은 없었지만 가만 보고 있으면 별이 보일 것 같았다.

“수영아.”

“응?”

“이 성곽에서 돌 하나를 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는 걸 생각하기 전에 너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음, 그대로일 것 같은데?”

“나는 그러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누가?”

“성곽이, 그 돌 하나가.”

한참 동안 성곽을 바라보고 있는 현남을 보면서 현남의 마음이, 생각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너 번 더 둘이서 만난 후에 현남은 나에게 연애하자고 이야기했다. 벚꽃이 지고 있던 때의 밤, 함께 걷다 내 손을 깍지 껴 잡고서 우리 연애하자고, 고백했다. 나는 웃으며 좋다고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좋았다.

내가 멈칫하고 서 있던 곳이 현남과 함께 멈춰서 돌 하나 빼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곳이었다. 어쩌면 현남에게 처음 반한 곳일 수 있는 장소이자 8년이라는 시간의 시작점. 남자친구의 말에 그곳을 금방 스쳐지나갔지만 자꾸만 그 돌 하나가 신경 쓰였다. 모두 회색빛을 지니고 있는 돌들 사이에 살짝 노스름한 색을 띠고 있던 돌. 평생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을 돌. 낙산 공원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 돌. 외로움을 아는 돌. 마음속에 그 돌이 들어온 것 같았다. 무겁고 저릿했다.

*

싸우길 반복하고, 이별을 번복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 줘야 할 모습부터 보여주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모두 보여줬었다. 더 이상 보여줄 모습이 없었을 때 했던 이별을 끝으로 현남과 8년 연애를 정리했다. 마지막 이별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주말 낮에 만나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다가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가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다가 헤어졌다. 깨어있는 하루의 절반을 넘게 함께 했으면서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게 먹고 걷고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 바닥에 침대를 등받이 삼아 앉아서 현남에게 헤어지자는 문자를 보냈다. 3분도 지나지 않아서 현남에게 답장이 왔다. 그래. 라고.

다음 날 집 안 가득 남은 현남의 흔적을 보며 이별 전에 한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했으면서 다시 돌아가려 할까 봐, 다시 흔들릴까 봐 지금 당장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밖으로 나가 우체국에서 가장 큰 6호 박스를 사 왔다. 들기에도 버거운 박스를 가지고 와 방 한가운데 놓고서 현남과 관련된 물건들을 넣기 시작했다. 처음엔 종이는 종이대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분리하려고 했다. 쓰레기는 그렇게 버리는 거라고 배웠고 그렇게 해왔으니까. 받은 편지를 넣고 아직 쓰지 않은 편지지를 넣고 벽에 붙여둔 사진을 넣고 함께 본 영화 포스터를 넣고 선물 받은 상자를 넣었다. 아직 공간이 널널했다. 다른 종이류는 없을까 고민하다가 선물로 받은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상자를 하나만 사 왔다는 걸 깨달았다. 우체국을 한 번 더 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마음이 저려서 웅크렸다. 분리수거라는 것이, 단순히 버릴 물건을 분리수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아직 마음속에서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현남을 나와 분리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남을 분리수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래도 그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시계 같은 일반 쓰레기도, 인테리어로 쓰고 있는 함께 마신 와인병도,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과 플라스틱 화분도 모두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노란 박스테이프로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모서리까지 꼼꼼하게 붙였다. 들어보니 혼자 들기에는 벅찼다. 그래도 혼자서 해야 할 일이었고 몇 번을 쉬어가며 분리수거장으로 가 박스를, 버렸다.

집안을 모두 치우고 나서 남은 건 데이터의 정리였다. 8년 동안 쌓인 사진은 모두 클라우드에 저장했는데 현남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당황했던 건 아무리 내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고는 하지만 현남이 벌써 공유를 취소하고 공유폴더에서 나가버린 점이었다. 내가 할 말이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서운함이 밀려온 건 사실이었다. 그냥 전체 선택해 삭제 버튼을 누르면 되는 일이었는데 나는 전체 선택이 아니라 사진 한 장 한 장을 선택해서 보았다. 한 번의 클릭으로 8년을 버릴 자신이 없었다. 문자 한 통으로 8년의 관계를 정리한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나는 현남이 하고 싶었던 일을 대신해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치사하게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문자는 보냈지만 지금 클릭을 못 하는 것일지 몰랐다.

사진을 하나씩 보며 마음이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지길 반복하다 한 영상 때문에 완전히 박살났다. 사진 속 현남의 모습은 내 기억 속 현남의 행동, 목소리가 조합되어 이루어져 있었다.

어쩌면 진짜 현남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영상은 내 기억이 아니라 현남의 그대로를 보여줬다. 다정한 목소리, 나를 배려하는 움직임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는 눈빛. 내가 틀었던 영상은 함께 청계천을 걸을 때 찍었던 것이었다. 광화문역부터 동대문역까지 곧게 뻗은 길을 걸었을 때였다. 처음으로 크게 싸운 뒤 화해하고 같이 걷고 있었는데 ― 이때 왜 영상을 찍은 건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 현남이 말했다.

‘수영아, 우리가 정말 크게 싸워서 정반대로 걷더라도 지구는 둥그니까 걷다 보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때 그 말이 우리가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라고 들렸다. 싸우고 난 뒤라 더 특별하게 들렸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걸 정리하고 있는 때에 다시 들은 그 말은 괜한 희망을 품게도 했다. 어떻게 하면 현남과 정반대로 걸을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지금 현남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어디로 걷고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그 방향과 정반대로 걸을 텐데, 한참을 걷다 다시 만날 텐데. 사진과 영상을 지우는 일을 멈추고 엉엉 울었다.

손 닿는 곳, 눈이 닿는 곳, 데이터 속까지 현남을 다 지워내고 나서 다시는 현남이 생각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나게 할 모든 것들을 치웠으니까. 그런데 정말 뜬금없는 곳에서 현남이 다시 떠올랐다. 지도 어플리케이션. 현남과 데이트 코스를 짜며 카페나 음식점을 모두 즐겨찾기 해놓았다. 카페는 노란색으로, 음식점은 분홍색으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켜서 서울을 중심으로 지도 사이즈를 줄이면 노란 동그라미와 분홍색 동그라미가 가득했다. 언젠가 이 화면을 보고 현남은 봄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가득 핀 서울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냥 맛집과 카페 리스트일 뿐이니 지울 필요가 없었고 현남과 함께 한 곳이라 생각하면 자꾸 무너지고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라도 지워야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핑계를 댔다. 아깝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복잡한 마음속으로 숨었다.

*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난 지 한 달쯤이 됐을 때 퇴근길 버스에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생각보다 빨리 더워지고 있는 날씨에 버스 안은 에어컨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사람이 너무 빽빽하게 타고 있어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창문을 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 같았다. 가끔씩 부딪히는 옆 사람의 피부는 불쾌했다. 내일 데이트 코스를 생각하려고 켰던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끄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집에 들어와 씻고 나와 시계를 보니 8시 15분이었다. 5분 뒤면 항상 전화가 왔었다. 지금 남자친구가 아니라 현남에게. 헤어지고 2주쯤 지났을 때부터 매일 8시 20분이면 현남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 번 받았는데, 만약 술에 취한 목소리라면 번호를 차단하려 했다. 그런데 현남은 너무 멀쩡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기 보단 할 수 없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현남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을 유지하다 현남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마 내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하는것 같았다. 서로의 하루 일정이나 동선, 쉬고 싶은 시간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정시 퇴근을 해 집에 들어와 씻고 방에 들어와 앉으면 8시 20분이라는 걸 현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 전부터 전화가 오지 않았다. 괜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이제 정말 나를 잊은 건가, 나는 왜 전화를 기다리는 걸까.

오늘도 침대에 던져둔 핸드폰을 바라보며 머리를 말리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드라이기를 놓쳤다. 쾅 소리와 함께 뜨거운 바람이 다리를 스쳤다. 급하게 드라이기를 주워 전원을 끄고 핸드폰을 들었다.

‘희준씨’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거지, 복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영 씨 아직 회사에요?”

“아뇨, 좀 전에 들어왔어요.”

“아, 연락 주시지…. 내일 잠실역에서 만나서 석촌호수로 갈 거죠?”

“네. 2시에 만나요.”

“좋아요. 차는 두고 갈게요. 피곤하실 텐데 쉬어요. 다시 연락할게요.”

머리를 다시 말리고 이불을 덮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아까 버스에서 확인하지 못한 석촌호수 근처 식당이나 카페를 찾기 위해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여전히 봄인 서울을 바라보다 이제 정말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의 기대도, 희망도, 바람도 이제는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매번 데이트를 할 때마다 현남과 함께 했던 거리와 가게들 때문에 멈칫거리는 건 정말 최악의 여자였다.

그동안 남자친구와 데이트했던 곳을 떠올리며 서울의 곳곳을 다시 살펴봤다. 먼저 혜화부터 살펴봤다. 지금 남자친구와 처음 데이트했던 곳, 아이러니하게도 현남과의 시작점인 곳. 즐겨찾기를 하나씩 클릭해서 해제하기 시작했다. 분홍과 노란색으로 빽빽했던 서울 북쪽이 점점 비워져 갔다. 그다음은 조금 더 동쪽으로 이동해서 안암동 주변을 비워갔다. 우연하게도 같은 학교 출신인 지금 남자친구 때문에 안암동 근처를 간 적이 있었다. 나도 학생이었고 현남도 학생이던 시절, 현남은 수업이 끝나면 항상 나에게 왔었다. 내 시간표를 달달 외우며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의실 앞에 있기도 하고 내가 현남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달려오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학교 앞, 혹은 근처 맛집이나 카페에서 데이트를 자주 했고 그만큼 즐겨찾기 한 장소도 많았다. 아무래도 남자친구도 같은 학교 사람이다 보니 가는 곳이 비슷했다. 그곳들도 깨끗하게 지워냈다. 최근에는 성수동을 자주 갔다. 현남과 한창 카페에 주구장창 앉아 시간을 보내던 때가 성수동에 수많은 카페가 생겨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성수동은 식당보다 노란 즐겨찾기가 가득했다. 이렇게 인스타그램에나 나올 법한 카페는 처음 와본다고 신기해하던 남자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핸드폰으로 노란 원들을 하나씩 지웠다. 내일은 잠실, 석촌호수였다.

벚꽃을 볼 수 있는 곳은 많았지만 나는 석촌호수가 좋았다. 벚꽃을 보면서 원형으로 된 호숫길을 걷다 보면 지나쳤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아도 같은 사람들을 볼 때면 원 안에 들어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길을 따라 돌다 보면 현남과는 이 원 안에서 언제나 빙글빙글 사는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호숫길에 사람들이 많아도, 함께 찍은 사진 배경에 사람들이 가득해도 상관없었다.

석촌 호수를 중심으로 큰 타원형으로 즐겨찾기 된 곳들이 빼곡했다. 내일 동선을 생각하며 미리 한 곳씩 지워나갔다. 지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해치워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12시가 넘어갔다. 먹먹한 마음을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가슴팍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다가 옆으로 돌아누워 잠이 들었다.

*

현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다. 처음엔 화가 났다. 20대의 절반 이상을 현남에게 투자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더 좋은 사람도 많았을 텐데, 더 웃을 수 있었을 텐데, 많은 사람을 잃을 일도 없었을 텐데. 현남과의 만남을 후회할 이유는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많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유들을 생각하고 있을수록 현남에게 더 화를 내고 싶었다. 내 시간을 돌려달라고, 8년이라는 시간을 다 뱉어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평생 원망할 것만 같았던 현남이 어느 순간부터는 사과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현남에 대한 화로 가득 찬 채로 며칠을 보내고나자 미안했다. 이별을 말 그대로 강제당한 현남은 어떨지 생각해보면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내가 현남에게 화가 난 것처럼 현남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현남이 이직을 하고나서 적응하지 못할 때 좀 더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줬어야 했다고, 아니면 내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한숨 쉬며 토로하지 말 걸 그랬다고. 현남에게 미안한 일들도 생각하니 끊임없이쏟아졌다. 미안한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됐을 무렵 나는 우리가 정말 헤어진 것인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함께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돈이 부족했던 학생 시기부터 자주 만나기 힘들었던 취업 준비 시절 그리고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던 사회 초년생까지 함께 한 일들을 나열한다면 나열이 가능한 일인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이제는 어엿한 한 사회의 일원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어떤 일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상상하게 됐다. 상상과 진실의 반복 속에서 시간을 한참 보내고 나자 이제는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그냥 너무 힘들었다. 현남이 없다는 것이,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고 견디기 버거웠다. 매일 같이 술을 먹었다. 그리고 입에 대본 적도 없는 담배를 배웠다. 꾸미지도 않고 건강을 챙기지도 않았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은서 언니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소개팅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소개팅을 해보자고. 그렇게 잊어보자고. 남자친구는 멀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떤 매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끌려나가다시피 세 번의 자리를 가졌고, 세 번째로 만난 날 남자친구는 계속 만나보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순간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현남에게서 벗어나긴 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속에 현남은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을 때 남자친구와 더 이상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강동 지역을 주로 다녔다.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특별히 좋은 관을 가야 한다고 차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왔고 그런 좋은 관이 강동에 있었다. 텐트폴 영화가 대거 개봉하는 때였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려고 하고 나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남자친구를 볼 때마다 현남이 떠올랐다. 지금 남자친구에게 고마운 만큼 과거 현남이 나를 위해 했던 행동들이 생각나 고마웠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문자 메시지 같은 텍스트가 아니라 내 목소리로 눈을 바라보며 해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 다짐과 함께 강동 쪽 즐겨찾기가 사라져갔다.

짧디짧은 가을의 순간은 주로 강서 지역을 남자친구와 함께 갔다. 주로 갈대밭을 보러 생태공원을 갔지만 대형 카페들도 돌아다녔다. 물론 현남과 함께 갔던 곳이었고 강서를 갈 때마다 하나씩 즐겨찾기를 지워갔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 한동안 빠져 있었던 감정, 미안함에 대해서도 현남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실 우리를 망친 건 나일 수도 있다고 그래 놓고 너에게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소한 것들도 정말 미안하다고. 기억나는 모든 잘못한 일을 전부 사과하고 싶었다. 이 또한 텍스트가 아닌 직접 만나서 해주고 싶었다. 그럴 기회는 점점 작아져 갔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항상 품고 지냈다. 강서 쪽 즐겨찾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워져 갔다.

작년에 비해 유독 추운 겨울에는 멀리 이동하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집이 서초구에 있었고 주로 집에서 데이트를 했다. 남자친구와 붙어 있는 시간이 겨울답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온기를 느끼고 있다 보면 이런 안정감을 8년 동안 단 한 번도 느끼게하지 않은 현남이 원망스러웠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온기를 느끼게 했다면 쉽게 사이가 틀어지진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자신이 없어서 움츠러들었던 현남을 생각하자 초라한 모습만 떠올랐다. 강남 쪽 즐겨찾기는 특별한 감정 없이 지워냈다. 근처를 가지 않았는데도 집 안에서 하나씩 지웠다. 원망은 지울수록 커졌다.

다시 봄이 돌아왔을 때, 날씨 때문인지 8년의 시작점이 봄이어서 그런 건지 현남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정어린 인사를 건네주고 싶었다. 시간을 보내며 고마움, 미안함, 원망을 거치고 나자 남은 건 안녕을 빌어주는 것이었다. 현남에게 어울리는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고, 사고를 많이 쳐 주눅 든 채로 다니던 회사에서도 떵떵거리며 살았으면 했고, 위가 약한 편이라 항상 고생을 하던 것도 이제는 건강해져서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애정어린 안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속 강북의 즐겨찾기를 하나씩 지워가고 있었다.

 

서울의 한 지역을 제외하고 남은 즐겨찾기를 지우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

마지막은 서촌이었다.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와 바로 왼쪽으로 꺾으면 300m 정도 곧게 뻗은 길이 나왔다. 그리고 그 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다양한 술집들이 있었다. 이 다양한 술집들이 전부 나와 현남의 단골집이었다. 사장님과 친하지 않으면 적어도 아르바이트생하고 라도 친했다. 어쩌면 가장 난관인 곳이 서촌이었다. 도대체가 즐겨찾기 되지 않은 집이 없었다. 오늘은 남자친구와 이곳 가게들을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산책 겸 이 길로 들어섰다. 차를 가져오지 않은 채 데이트를 했다. 운 좋게 경복궁 야간 개장 예매에 성공해서 입장 시간인 7시가 되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애초에 야간 개장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이제야 모든 즐겨찾기를 지워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남자친구와 팔짱을 끼는 것도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꾸밈없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친구와 곧게 뻗은 길로 들어섰다. 한참을 걸으며 상호가 바뀐 가게들을 눈으로 짚어 보았다. 여기도 많이 변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정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아 얼굴 전체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드러난 눈과 귀만 보아도 현남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서현남.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잠깐 멈칫했는데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현남의 옆에는 다른 여자가 현남의 코트에 손을 넣은 채 현남과 함께 걷고 있었다. 긴 생머리, 큰 키, 까무잡잡한 피부, 청바지가 어울리는 체형, 진한 화장, 노출이 있는 옷.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여자였다.

현남은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멈칫거렸다는 걸 남자친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오히려 빠르게 걸었다. 그때, 현남과 눈이 마주쳤다. 현남의 눈이 잠깐 커졌다. 눈이 마주치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연인일 여자의 말에 대답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걸었다. 현남도 아무렇지 않게 계속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길게 뻗은 길에서 서로 마주 보며 걸어오다 스쳤고 계속 정반대로만 걸었다. 한참을 걷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자.”

남자친구는 별 말없이 내게 이끌려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길을 계속 걸으며 남자친구 몰래 서촌의 즐겨찾기를 하나씩 지워갔다. 서울의 마지막 즐겨찾기들이었다. 지우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현남에게 미안함, 고마움, 원망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 심지어 안녕을 빌어줄 마음조차 없다는 것. 마음속 어디에도 현남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남과의 사랑은 끝이 났다. 낙산 공원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서울을 통과하는 한강을 기준으로 강북, 강동, 강서, 강남 지역도 매몰되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제 더 이상 현남과 함께한 서울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수 당선 소감

 

 

이정훈(산업‧데이터4)

황정은 작가는 글을 읽고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원고료와 인세 수입이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정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근력 이라고 말합니다. 담백하고 단순하며 완벽에 가까운 그 말을 전 좋아합니다. 살아가며 근력에 대해 종종 생각합니다. 근력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참 많은 것들이 요구됩니다. 규칙적인 운동, 규칙적인 생활, 규칙적인 작업 습관 같은 것들. 전 온통 규칙적인 것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 수상 관련해 전화를 받았을 때 불규칙한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수상을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정좌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기분이었으니까요. 정말이지 근력이 조금 붙은 것 같았습니다. 이 불규칙성을 오래 소중히 기억하겠습니다. <Goodbye Seoul>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소설 속 수영과 현남에게 인사합니다. 근력을 붙여주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마워. 규칙성을 유지하면서 때때로 불규칙성을 바라겠습니다. 오래, 지치지 않고 꾸준히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쓸게요. 글쓰기라는, 소설 짓기라는 근사한 일을 계속해 보겠습니다.

 

 

「돌려주세요 천사님」 

지독한 밤, 이라고, 눈을 감은 채 우리는 생각한다.

여섯 시에 마감하는 업무는 진작 마무리했다. 창조주의 자비로운 광휘가 사라진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평탄한 권태와 함께 다음 일출까지 허용된 짧은 휴식뿐.

이곳에서 지독하다는 속성은 이따금이라는 표현보다 조금 더 잦은 빈도로

출현한다. 바깥의 빗줄기가 유독 거세서, 흐느끼는 영혼들의 메아리가 더 멀리 울려 퍼져서, 어둡고 습기 찬 그래서 눅눅한 공기가 살갗에 들러붙는 찐득함이 마뜩잖아서, 쉰다는 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어도, 이건 그저 그런, 별거 없는 보통의 하루.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살아왔으나 변화는 도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정말 권태로워하는 것이 예외 없음 그 자체인지 혹은 가능성 없는 희망인지 알 수 없어졌다. 다만 육신은 물질로 존재하는 실체. 그것은 방치 끝에 스스로 무뎌지곤 하는 정신 관념과는 달라서 당장의 처치를 요구한다. 그것이 고작 비 오는 날마다 관절에 느껴지는 사소한 통증일지라도. 그래서 우리는 날갯죽지의 관절이 뻐근하게 당기는 부위를 가볍게 쥔 주먹으로 몇 번 두드린다. 통통. 통통. 똑똑….

똑똑.

저기요.

천사님. 여기 계시죠. 저 좀 도와주세요.

하여 실로 지독한 밤은 이 문 너머 당신의 간곡한 부름에서부터 출발한다.

 

 

문을 열어주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오늘치 업무는 이미 끝났다. 내일 오시라고 해라.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 빗속을 뚫고 여기까지 찾아온 갸륵한 영혼을 쫓아내는 것은 천사로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다. 아니다, 왜 그럴 수 없는가? 애초에 우리가 천사의 법칙에 얽매여야 하는 까닭이 있는가? 위대하신 창조주, 그의 옷깃은커녕 천국도 지옥도 문턱조차 쳐다보지 못한 떨거지들인데. 그래서 하필 이 중간지대에 떨궈져 평생 노동해야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딱한 존재들이 아닌가. 아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새어버리는가? 대체 언제까지 그 불경한 사상을 우리에게 옮길 것인가? 아니다, 도대체 천사 아닌 천사로서 불경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이에 조용히 문을 열어준 평화주의자 직원 덕에 당신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이 쉼터에 침입한다. 조금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던 우리가 금세 각을 맞춰 손님을 대접하고 응접실에 모셔 올 때까지, 당신은 꾹 다문 입으로 바닥만 보며 걷는다. 몸이 다 젖은 채로 떨고 있는 당신. 그 점이 왜소한 당신의 체구를 조금 더 가련하고 애처롭게 보이도록 만든다. 논쟁을 벌이던 우리 역시 침묵을 유지하며 당신을 관찰한다. 허여멀건 막이 껴서 완전히 검지 못한 눈. 훌쩍이는 축축한 코. 현저하게 느린 걸음. 불안전한 관절 움직임의 연쇄. 그 모든 궤적에서 묻어나는 오랜 삶과 생의 증거. 우리는 갑작스러운 추가 업무에도 불구하고 조금 경건하고도 우러러보는 마음이 되어서는 어깻죽지의 기름기 도는 날개깃을 가지런히 접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이곳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불로불사로 살아가는 우리지만 하나의 영혼이 지상에서 탄생과 죽음을 거치는 동안 축적되는 다양한 삶의 질감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 영혼의 경험은 어쩌면 하나의 우리보다 더 거대한 양을 포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낯선 경이로움이 이런 영혼을 보면 종종 떠오르곤 한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는 당신이 앉을 수 있도록 반사적으로 친절하게 안내하면서도 하릴없이 각자이자 동시에 생각한다.

 

 

“누군가 제 기억을 뺏어가고 있어요.”

짧은 침묵. 조금 당황해서 몰래 얼굴을 드는 우리끼리 눈이 마주친다. 어어. 이

영혼이 지금 뭐라는 거야. 당신 앞에 마주 앉은 담당 직원은 표정을 숨긴 채 사근사근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그러시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매가리 없는 다정한 물음에도 늙은 당신은 다소 격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천사님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건 어렵겠지만, 당사자인 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요. 제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어요. 기억이 없는 내가 어떻게 나일 수 있나요.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과거와 미래가 통과하는 현재의 꼭짓점에서 만나 나라는 자아를 만들어주는 것인데요. 그런데요. 요즘에는요. 며칠 내내 뭔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한참 불안하고 초조했는데, 그러면서도 그 불안함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분실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꽉 막혀서, 차올라서, 그게 꼭 목구멍까지 틀어막을 것만 같은 기세로 제 안에 차올라서, 이건 과연 잃어버리는 것인지 채워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네, 오늘 오후에 천사님과 면담한 뒤로 확실해졌어요. 제가 잃어버리고 있는 건 기억이에요.

지금은 제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사이 간식거리를 가져오던 직원이 테이블에 미지근한 그릇 몇 개를 부산스럽게 내려놓는다. 하나는 작은 찻잔 같이 생겼지만, 다른 하나는 바닥이 넓고 완만한 모양이다.

트레이에는 쿠키인지 비스킷인지 모를 버석버석한 과자가 담겨온다. 퇴근 후에도 일해야한다니, 최악이야,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 같던 직원의 얼굴은 당신의 항의이자 도움 요청을 듣고 조금 창백하게 질려버린 듯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눈앞의 생수로 목을 가볍게 축이나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마시거나 먹을 기분이 도저히 들지 않아 생전그렇게도 좋아했던 간식을 마다한다. 뭔가를 배불리 먹는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소파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한숨 쉬는 당신의 모습에 우리는 한층 더 곤란해지고 만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난처해하는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실은, 당신의 기억이, 정말로, 우리에게 회수당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알게되면.

우리 모두의 창조주께서 친히 눈물 흘려 그 밍밍한 물방울로 비를 내리고 계신 이 축축한 저녁에, 셔터 내린 센터를 참지 못해 기어이 우리들의 쉼터로 찾아온 당신이, 고작 업무 외 시간에 초과 근무하게 만들어서, 따위의 이유로 불편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는 당신이 기억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그 사실 자체로 더없이 난감해졌다는 말이다. 여태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거나, 적어도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내가 일하기 시작한 이래 최초는 당신이었으니까.

그래, 최초의 당신.

그리고 물론 알겠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 도무지 성경을 읽은 적이 없는 당신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음, 그래, 어쨌거나 말이지. 공교롭게도, 우리는 최초라는 단어에 트라우마가 있다.

고개 들어 최초의 인류인 아담을 보라. 그가 저지른 원죄를 목격하라. 최초라는

것은 허락과 승인을 거치지 않은 날것의 속성.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이탈. 가장 처음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기존 평화에 대한 반항이고 저항이며 불복종의 언어이다. 아담은 위대하지만 뜻을 알 수 없는 짓궂은 신의 명령을 거부한 벌로 그의 고향에서 쫓겨났지. 그리고 내 선배는 그가 다시는 에덴동산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불의 검을 든 채 경비를 서라는 명령까지 받지 않았던가. 물론 시름에 빠져 밤낮을 고사하고 우는 창조주와 그 눈물이 거센 빗줄기가 되어 지상을 적시는 바람에 추위와 빗물을 견디지 못하고 동사하기 직전이었던 아담 사이에서, 선배가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신 몰래 불의 검을 홀라당 건네주고 와버렸다는 일화, 그게 인류가 최초로 향유한 불이었다는 일화는 이제 우리 모두가 심심할 때마다 화자하곤 하는 일종의 썰, 같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최초의 아담은 추방이라는 벌과 불이라는 자비를 동시에 받은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최초로 환생의 섭리를 일부 자각하게 된 당신은 어떤 벌과 자비를

받아야 할까.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초조하게 혀를 빼물고 발을 구르던 당신이

문득 외친다.

“천사님.”

“저를 도와주실 거지요? 당연히 그래 주실 거지요?”

 

 

“그 광륜과 날개를 단 자로서 제가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찾을 수 있게 마땅히

도와주실 거지요?”

그리하여, 역시나 아무도 나설 수 없는 낯선 침묵.

 

 

당신은 이제 전처럼 울상으로 어깨를 움츠린 채 그렁그렁한 눈을 감았다가 뜨지

않는다. 그러고 있을 바엔 아예 울대와 가슴과 입을 사납게 울리며 으르렁거리는 게 확실한 의사 전달 수단이 되겠다고 판단한 것인지 몰라도, 아무튼 당신의 심기는 확실히 좋아보이지 않는다. 답 없는 우리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처럼 준비 자세를 슬금슬금 취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건 마치 ‘이보쇼, 난 다 알고 있으니 대충 넘어갈 생각일랑 마시지’라고 하는 영혼의 강박적 자세인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선’이라는 절대 매뉴얼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 죽은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배정받기 직전까지도 삶에 대한 강한 욕구나 미련을 보인다면 바로 이 중간지대에서 면담과 기록을 통해 기억을 알음알음 빼낸 뒤 얼마 못 가 완전히 백지가 되어버린 그를 갓난아기의 형태로 되돌려보내게 되는데,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당사자들은 알 수 없는 구조로 은밀하게 진행되고, 말하자면 우리에겐 이 모든 절차와 그로 인한 결과가 ‘절대선’인 셈이다. 경이로우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모든 생명은 언젠가 행성의 중력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지나치게 가벼워진 존재가 하늘의 문을 열고 이곳까지 도달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왔다. 심판의 저울에 올라가는 것이 두려운 자, 다른 존재가 되어 보고 싶은 자, 그 이전의 삶에서 겪었던 은혜와 복수를 갚고 싶어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손을 거쳐 다시 지상으로 떠났다. 물론 전생의 그 어떠한 기억도 가져가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그렇게 다시 한번 부여받은 생에서 전과 똑같은 과오를 저지를 것인가, 혹은 그토록 바라던 대갚음하기를 이행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영혼에게 달린 일이었다. 그것을 바랐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면서도 결국 본인이 바랐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도록 설계된 이 구조가 우리 역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떼를 쓰고 화를 내고 울고불고 짖고 날뛰어도 예외를 둘 수는 없다는 게 우리의 입장. 말마따나 이 상황을 대충 넘어가고자 했다면 지금 당장 모든 기억을 통째로 빼앗아 버리려고 했겠지. 그렇게 하면 우리로선 잃을 게 없는 조치겠다.

새까만 망각에 몸을 완전히 적신 당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가 준다면, 우리도 다시 돌아온 짧은 밤의 평화와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되겠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선이냐 악이냐의 이분법적 문제 탓이

아니라, 그렇게 단숨에 기억을 억지로 빼앗겨 버린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렇게 말했지. 기억이 없는 내가 어떻게 나일 수 있냐고.

맞다. 당신이라는 자아는 체험과 기억과 감각으로 견고해지는 예술 작품이다. 만지면 만질수록 단단해지는 회전판 물레 위의 흙이다. 그러니 누군가 공고하게 쌓아 올린 존재를 깨끗하게 허무는 데에도 마땅히 그에 비례하는 시간과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공을 들여도 죽지 않은 자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게 될 당신마저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아직도 찾지 못했지만. 그래서 우리가 지우는 건 고작 당신 혼자만의 기억뿐인데도, 그마저 견딜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당신에게도 분명 어떠한 사정이 있는거겠지만.

하지만 당신,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계 어디에도 사정이 없는 시시한 영혼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 눈에는 한결같이 절절한 비극,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신파극,

클리셰로 범벅된 것 같은 뻔한 스토리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라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수긍하고 털어놓을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다. 멍청한 것은 선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은 멍청한 것이 아니라는 바를 우리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진다니 그럴 일은 없다고, 모든 게 기분 탓일 뿐이라고 애써

설득하던 우리의 시도는 당신의 화를 더 돋웠을 뿐만 아니라 신뢰도마저 저 밑바닥까지 추락시킨 모양이다. 들고 있던 찻잔과 함께 덜덜 떨면서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말을 아끼던 담당 직원이 결국 이 모든 절차의 필요성을 또박또박하게 발음하기 시작했을 때, 일그러지던 당신의 얼굴, 기어이 배신을 당해버린 영혼의 표정. 우리는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제법 괴롭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 다다라서는 결국 당신이 우리의 입장과 당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 조금은 서글프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돌아가주길, 조마조마한 자세로 바라게 된다.

그러니 당신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을 때, 쉼터가 뿌리째 뽑혀 나갈 것만 같은 데시벨로 울어 젖히며 내 기억을 돌려달라고 떼쓰기 시작했을 때 말이다. 어쩌면 우리의이런 소망을 뻔히 읽고도 어울려 주기 싫어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순간적으로, 정말 찰나였지만, 아무튼 그런 기만적인 감상이 우리 안에 피어났던 것을 용서하라.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라는 영혼의 기억은 이제 정말 거의 다 지워진 상태였으니. 누군가 억지로 당신자아를 훔쳐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불쾌한 경험이 되겠지만, 이제 고작 며칠만 더 있으면완전히 무로 돌아갔다가 다시 유로 창조되는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도그토록 서글퍼하는 이유를 우리로선 알 수 없었는데.대체 어떤 기억의 조각을 여태 품고 있길래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담당 직원이 급하게 꺼내 보여준 당신의 기억을 훑으며, 우리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어버리고 만다.

 

 

너무 어린 당신.

당신은 이제 막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여태 당신을 감싸고 있던 아늑하고 부드러운 세계가 돌연 깨져버리고, 전생의 어떤 당신이 이 삶을 바랐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당신은 험악한 지상으로 내려앉는 중이다.

당신은 온몸이 구겨진 채로 출산되며 생각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결코 바란 적이 없노라고.

세계와 영혼의 순환을 위해 일하는 천사가 실존한다면 그들은 일 처리를 아주 엉터리로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이것이 당신에게 남겨진 기억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이제 막 태어난 당신은 쏟아져 나오는 빛과 소음에 잔뜩 겁을 먹고 울기 시작한다.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누군가가 당신을 안심시키듯 젖은 몸을 핥아주고 젖을 물린다. 문득 당신과 같은 처지로 태어나 악을 쓰고 눈을 감고 버둥거리는 존재가 이 세계에 지나칠 정도로 아주 많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자, 당신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 짧은 사이 당신은 많은 곳을 경유하게 된다. 요람, 비닐, 박스, 쓰레기통, 그곳들은 양수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세계다.

당신은 태어나기 전의 그리운 세계를 떠올리며 운다. 자면서도 운다. 시체가 되어가는

형제들의 차가운 몸뚱어리를 비벼가며 운다. 그리하여 누군가 당신을 발견하게 되기까지의 일.

 

 

이것이 당신에게 남겨진 기억인가?

그럴 수는 없다.

입양된 당신은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본다. 닫혀 있던 귀를 열고,

점액으로 막혀 있던 코를 비우고, 그의 다감한 음성과 진한 냄새를 느낀다. 형상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는 순간은 곧 당신의 지각과 판단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너무나 거대하고 상냥한, 그래서 눈이 부실 정도의 아름다운 사람. 당신이 아플 때도, 즐거울 때도, 슬프고 화가 나고 흥분하고 행복하고 처참하고 토라지고 서운하고 신나고 미안하고 눈치 보고 그러다가도 금방 다시 사랑해서, 사랑하게 되어버려서, 사랑하므로 줄곧 붙어 있고 싶어하던 지난 모든 날들에 그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는 너무 긴밀하고도 치밀하게 당신 삶에 녹아들어 어떤 장인의 가위를 사용하더라도 도려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당신은 온전히 당신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렇게 단순한 삶을 살지 못했다. 당신과 그의 복합, 당신과 세계의 융합, 당신의 감각과 그의 사랑과 세계의 자비로 당신은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도 당신이라는 시를 쓸 수 있었지. 하나의 생이 얼마나 견고하고 무른가, 그런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어떻게 쓰였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쓰였냐이다. 그런의미에서 당신 삶은 아주 다양한 복합 매체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 당신의 지난 생에서는선선한 가을바람의 냄새와 한낮의 무더운 공기와 사람들 손길이 전하는 진한 온기와 밟힌 나뭇잎이 부스러지는 소리, 그 울림이 땅으로 꺼져 또 다른 생명의 근간이 되는 진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사람. 그가 당신의 핵심이 되는 구 형태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그가 당신에게 해주었던 모든 언어들. 모든 몸짓들,  모든, 그의 모든 것.

이것이 당신에게 남겨진 기억인가?

글쎄,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당신은 이제 그의 이름도 떠올리지 못한다. 그가 대체 왜 당신에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전해주었는지 알 길이 없다. 맥락이 도려져 나간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지. 하루는 당신이 무언가 잘못 먹고 죽음의 직전까지 내몰렸던 날이 있었다. 고작 섭취의 오류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몸이라니, 너무나 연약한 육신 탓에 당신은 제법 억울하다는 기분이 되었을 법도 하지만. 이제 다시 태어나기 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건가,

지레짐작했을 법도 하지만.

그날 어떻게 해서 당신이 살아나게 되었는지 역시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겨울. 입양되지 않았을 다른 평행우주의 당신이라면 그때 그 쓰레기통에서 얼어

죽었을 법한 날씨. 달빛도 별빛도 없는 한밤중에 그는 당신을 품에 안고 달렸다.

폐가 쪼그라들어 안으로 터질 것만 같은 감각, 목구멍에서 피가 역류하는 듯한

착각, 그 엄동설한에 낡아빠져서 밑창이 덜렁거리는 슬리퍼를 다급하게 꿰어 신고,

아스팔트에 신발이 턱턱 걸려 몇 번이고 넘어질 것처럼 다리가 꼬여도, 그러다 정말 자세가 무너져 무릎이 갈려 나가는 한이 있어도. 가슴과 배에 딱 붙인 당신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했던 그를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신이 급하게 수술받는 동안 대기실에서 한참 왔다 갔다 하며 도통 가만히 있지를 못하다가 몇 시간 뒤에 다 잘 끝났다는 병원 원장의 말 한 마디에 깨진 무릎으로 맨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는 일은 애초부터 알지 못했던 숨겨진 사실이지만.

그러니 이것이 당신에게 남겨진 기억일 리 없지만 말이다.

당신이 돌려받고 싶은 것은 그의 사랑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영혼에 각인되어 최후까지 잔류하기를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지독한 사랑인 모양이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당신은 이제 정말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어리고 젊었던 과거의 나날들이 전생처럼 느껴지다가도 당장 시계를 오 분만 돌리면 당장 그 시절로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역행하는 시계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먹는 것도 걷는 것도 무언가 느끼고 소화해서 체화하는 모든 과정을 거부하게 되었던 그때. 안녕, 잘 있어, 나는 이제 떠나, 그 모든 인사를 고요하게 전하려고 눈을 감던 그때.

그가 죽어가는 당신을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그가 당신을 쓰다듬었다.

상냥하게. 다정하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매번 그래왔던 손길로. 마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로. 고요하게 울며. 웃으려고 노력하면서. 제발 죽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빌고 당신 영혼을 붙잡아 끌어내리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을 단단히 밀봉한 채. 무거운 마음은, 무거운 사랑은 그가 영원히 품은 채로 여기에 남을 테니 너는 가벼운 영혼만을 가지고 날아가라고.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자장, 자장, 이제 가니.

 

 

자장, 자장….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해, 아주 오래….

그 순간.

바로 이 순간이 당신에게 남아있는 가장 소중한 기억이다.

바로 이 순간이, 당신이 나 역시 사랑한다고 답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아 가장

한스럽게 남은 후회의 장면이다.

그렇지?

 

 

너무 많이 울어서 탈진하기 직전의 그를 여전히 앉혀둔 채로 우리의 회의는 한없이 길어지는 중이다. 이 기억마저 며칠 뒤에 완벽하게 거둬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저렇게 후회하고 있어서야 모든 감각을 제대로 걷어낼 수 있겠냐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시되었다.

한이 깊다면 상황에 대한 기억은 지워져도 영혼이 체화해 버린 감정은 온전히 지워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구태여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간혹 그런 영혼들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안다. 그 경우에는 환생한 뒤에도 전생의 인과관계에 잡아 먹혀 번번이 삶을 망치곤 했다는 것 역시 알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그냥 이대로 냅다 천국에 올려버리는 건 어때. 심판이야 누구보다 금방 통과할거야. 온 생애에 사랑과 충실함만을 기록하고 온 영혼이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저렇게 슬퍼하는데 천국에 간다고 행복해질 것 같아? 차라리 기억을 모두 돌려주고 환생시켜주자. 불쌍해서 더 못 보겠어.

너야말로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 게다가 그렇게 태어나봤자 기억 속의 그 사람을 찾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평생을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서 외로워하다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할래? 전생의, 그리고 그 전전생의 기억까지 전부 가진 채로 다시 땅에 돌려보낼래? 어떻게 책임질 거야?

한창 말다툼에 열을 올리던 그때, 어느 순간 조용해졌던 당신이 소리 없이

살금살금 우리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곤 무언가를 본다.

거기에 당신의 그가 있다.

당신 생의 기억을 보여주던 스크린은 할당된 지분이 끊기자 스스로 남겨진 그의 생을 비추고 있던 모양이다. 당신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 광경을 입 벌린 채 쳐다보고 있는 걸 깨닫자 우리 중 누군가가 황급하게 스크린을 꺼버리려고 벌떡 일어났다가 마찬가지로 우리 중 누군가에 의해 저지당하고 만다. 은은하고 엷은 색채로 상영되고 있는 그의 삶.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 당신을 안고 달리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보폭. 당신은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스크린을 문지르지만 지상에 있는 그에게 닿지 않는다.

“천사님, 천사님 제발요. 적어도 지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라도 해주세요.

그거면 충분해요. 저 사람이 저를 사랑해주었던 만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많이, 내가 더 많이 사랑했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제발요….”

우리 중 옷자락이 꽉 붙들린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당신을 뜯어말릴 수 없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부지런히 언덕과 계단을 오르고 입구를넘어 납골당에 도착한다. 꽃과 인형과 간식 등이 넘쳐나게 채워진 그곳에 여태 머뭇거리던 그가 멈춰 선다. 당신의 생전 사진과 가벼워진 육신을 담은 그릇이 거기에 있다. 당신은 이제 우리에게 매달리는 일을 포기하고 그에게 닿기 위해 몸부림친다. 나 여기에 있어.

사랑해. 제발 들어줘. 그때 답하지 못해서 미안해.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해.

타들어 가는 당신 속을, 저기에 남겨진 그가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하지만 당신. 어쩌면 당신의 대답은 진작에 전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저렇게 기도할 수는 없으니까.

당신을 잊지 않았고,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주위에서는 새 동생을

입양하라고들 하지만, 아직은 마음이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았다고. 당신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직전 마지막으로 나를 미약하게나마 핥아주었던 그때. 당신 역시 나를 많이 사랑했구나, 알 수 있어서 도저히 그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고. 분실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 새 강아지를 데려오는 건 운명처럼 다가오는 언젠가의 일로 미뤄두겠다고. 그리고 그때엔, 어쩌면, 다시 환생해서 나에게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당신을 다시 한번 사랑하고 싶다고.

그가 한참을 납골당 앞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스크린의

영상은 끊긴다.

어느 순간부터 짖지도 날뛰지도 않던 당신은 멍하게 그 큰 눈을 깜박인다.

그리곤 우리에게 처음과는 조금 다른 부탁을 하는 것이다.

천사님.

제가 다시 한번 저 사람의 곁에 갈 수 있도록, 환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어요.

 

 

내가 가진 모든 사랑의 기억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면, 저 사람의 곁일 수 있게, 도와주시겠어요.

그리하여, 역시나 우리 모두가 눈물로 동의하는 마지막 순간.

 

 

당신, 만족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의 곁으로 돌아간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쑥쑥 자라고 있는 당신을 보면 우리가 다 뿌듯해지곤 합니다. 우리의 업무는 여전히 너무나 많고 너무나 막중해서 온종일 당신에게 신경을 쏟지는 못하지만,그래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돌아가며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사람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고집스럽게 개의 형상을 택했지요.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또다시 그의 품에서 눈을 감게 될 것이고, 동등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담당 직원이 아무리 설득해봤자 당신은 우리 말을 듣지 않았어요. 고작 흔들 수 있는 꼬리 때문은 아니었겠지요.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은 꼭 가져가고 싶었던 무언가. 그러니 당신의 선택이 만족스럽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어떤 기억도 남기지 않은 채 지상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의 시작부터 바란 적 없는 삶을 부여한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당신이 전생의 기억을 완벽하게 되찾는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테고 그래서 몇 년 뒤에 다시 똑같은 사건을 재현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그건 최초의 당신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하고, 자비이기도 합니다.

이번 생에도 마음껏 사랑을 누리시길. 그리고 답하시길.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말해주세요.

덕분에 행복했다고 말입니다.

 
 
우수 당선 소감
 

 

정예림(회화4)

 

소설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은 제법 어려운 일 같습니다. 문장을 나름대로 유려하고 세련되게 꾸며도, 메시지를 꾸역꾸역 짜 맞춰 호도하여도 정작 읽는 사람의 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휘발된다면 그것은 쓰는 사람에게 제법    슬픈 일이 되겠지요. 너무 숨기지도,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도 않는 것. 그것이 좋은 표현 방법인 것 같습니다. 물론, 통상적으로는요.

이번 소설을 쓸 때는 다정함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만, 그렇다고 한 톨의 여과도 없이 곧이곧대로 의도를 읊은 시도가 얼마나 효과적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떠밀다시피 마음과 마음을 강조하고 있어서, 다소 유치한 전개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저는 이 글을 썼어야만 했습니다. 우울감에 젖어 널브러진 나를 일으켜 줄 수 있는 직접적인 호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썼습니다. 가장 다정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대로, 힘낼 수 있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썼습니다. 그 다정함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저였던 것 같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인데도 수상하게 되어 놀랍고 기쁩니다.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리며 올해 가을과 겨울은 모두에게 조금 더 다정한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송민호

국어국문학과

매년 어떤 기념일이라도 돌아오는 것처럼, 무더위가 가시고 살갗에 찬 바람이 느껴지는 때 홍대신문 48회 학예술상 소설부문의 심사를 마쳤다. 때론 서사의 위기가 거론되기도 하고, 문학의 불황을 입에 올리기도 하는 시대이지만, 예년에 비해 많은 편수의 응모된 소설들을 보니, 어쩌면 위기에 대한 예감은 이른 것이 아닌가는 기분마저 든다. 게다가 응모된 총 9편의 작품들 모두 수준이 높아 심사는 그리 쉽지 않았다.

우선, 주제가 흥미로웠던 <월동>과 문장과 구조가 매끄러웠던 <Goodbye Seoul> 사이에서 고르다가, 그래도 <Goodbye Seoul>의 매끄러움에 조금 더 점수를 주었다. 그 외에 형식이 실험적이고 독특한 사유가 눈에 띄는 <돌려주세요 천사님>, 과학소설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흥미로운 플롯과 주제를 선보인 <물 먹은 고백>까지 총 3편 사이에서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지만, 결국 로봇 보모라는 SF적 상상력과 소설로서의 이야기적인 맛을 가지고 있는 <물 먹은 고백>을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 수준 높은 작품을 응모해준 모든 예비 작가들에게 마음 깊은 응원을 보낸다. 부디 지치지 말고 계속 쓰고 또 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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