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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에 담긴 김애란의 청년상, 『침이 고인다』(2007)·『비행운』(2012)·『바깥은 여름』(2021)

좌절된 꿈을 감싸 안는 성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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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침이 고인다』(2007), 『비행운』(2012), 『바깥은 여름』(2021)/출처: yes24
▲(왼쪽부터) 『침이 고인다』(2007), 『비행운』(2012), 『바깥은 여름』(2021)/출처: yes24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위치한 노량진역은 수도권 지하철 1호선과 9호선이 만나는 유일한 역이다. 수산 시장부터 사육신공원, 노량진 곳곳에 자리한 학원가까지. 다양한 장소에 걸맞게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김애란의 단편에는 유독 노량진이라는 장소가 자주 등장한다. 기자는 김애란 작가의 단편들인 「건너편」,     「자오선을 지나갈 때」, 그리고 「서른」의 배경인 노량진 일대에 방문했다.

 

1999년 3월. 나는 처음 노량진역에 하차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갯바람 냄새가 났다. 대부분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나는 냄새였지만, 누군가는 그것이 63빌딩 수족관에 있는 생선들이 하늘에서 상해가는 냄새라고 했다.

 

『침이 고인다』(2007)의 단편,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주인공 ‘아영’은 불문과 졸업 후 작은 학원의 강사직을 전전하는 취업준비생이다. 서류 전형에 번번이 떨어지던 아영은 어느 날 노량진역을 지나며 재수 시절의 기억을 되짚는다. IMF가 터진 다음 해, 입시 실패와 함께 노량진으로 향한 아영은 여성 전용 독서실에 묵었다. 그 당시 아영에게 허락된 것은 K-59라는 번호가 붙은 작은 칸막이 책상만큼의 공간뿐이었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아영이 종종 들르던 사육신묘
▲⌜자오선을 지나갈 때⌟의 아영이 종종 들르던 사육신묘

그동안 나는 ‘수학’이나 ‘내신’ 탓이면 몰라도 ‘IMF’ 때문에 대학에 떨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게다가 ‘IMF’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네가 대학에 떨어진 이유는 올해 카시오페이아좌에 있는 7789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반짝거렸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이 들렸다.

 

기자는 노량진역에서 내려 사육신공원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공원을 두 바퀴쯤 돌았을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육신묘를 찾으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 기자의 모습을 보다 못한 이가 기자를 사육신묘까지 안내해줬다. 멋쩍은 기분으로 조용히 카메라를 꺼내 들어 찍은 사육신묘는 고요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돌바닥에 앉아 숨을 가다듬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이 공원을 가득 채웠다.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바쁘게 생활하던 아영의 유일한 안식처. 마음이 답답할 때면 바람을 쐬던 아영처럼, 기자는 그곳에 한참을 가만 앉아 있었다.

아영의 말마따나 노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다. 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계속 원서를 넣을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지 결정하지 못한 아영은 오늘도 노량진을 지나는 열차에 몸을 맡긴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왜 여전히 이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지 골똘히 생각한 채.

갯바람을 몰고 오는 노량진 수산 시장은 『바깥은 여름』(2021)의 단편, 「건너편」의 배경이기도 하다. 「건너편」의 주인공 ‘이수’와 ‘도화’는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만난 8년 차 연인이다. 8년이란 세월이 말해주듯, 2년 만에 시험에 합격한 도화와 6년의 수험 생활 끝에 결국 노량진을 떠난 이수와의 간극 역시 커져만 갔다.

그렇게 덜컥 노량진을 나온 이수는 인턴을 전전하다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 취직한다.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으로 남는 것이 싫어 수험 생활을 그만둔 이수는 직장에 가도 자신이 ‘있을 뻔한 곳’, ‘있어야 했던 곳’을 쳐다봤다. 사회인으로서의 여유를 점점 잃어가던 이수와, 그런 이수에게 오늘 밤에는 꼭 이별을 고하겠노라 다짐하는 도화 사이의 거리는 이미 크게 벌어져 있다.

▲⌜건너편⌟의 이수와 도화가 이별한 노량진 수산 시장
▲⌜건너편⌟의 이수와 도화가 이별한 노량진 수산 시장

기자는 크리스마스 당일 오랜 연인이 향했던 수산 시장에 갔다. 사육신묘 앞 길게 늘어선 컵밥 거리를 지나치고, 다시금 노량진역에 이르러 갯바람을 따라 향한 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기자는 어디서부터 구경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오직 그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몸에 잔뜩 묻힌 채, 정처 없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누군가가 가게 주인과 한창 흥정 중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이 팔딱거리는 생선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다는 크리스마스 날 이곳에 온 이수와 도화 역시 기자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노량진에 그렇게 오래 머물렀는데도 처음 와보는 수산 시장에서, 본래 가기로 했던 가게를 찾지 못해 몇 바퀴 돌던 이수는 도화의 눈치를 보며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한 접시에 25만 원이나 하는 줄돔회를 흥정 없이 덜컥 산 이수는 못마땅한 걸음을 옮긴다. 이수와 마주 본 채 가만히 회를 먹던 도화는 전날 이수가 저 몰래 전세금의 일부를 빼내고는 월세로 돌렸음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돈의 행방을 묻는 말에 이수는 한참을 얼버무렸다. 그곳에서 함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명학’을 마주치면서 이수가 다시 수험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아. 잘될 것 같아. 사 년 전에도 마지막이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도화야, 조금만 기다려 줘.”

 

“이수야.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

 

생선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흥정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좋은 생선은 어떻게 알아보는 것인지…… 그 무엇도 알지 못했던 기자는 다른 이들이 즐겁게 웃으며 회를 먹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수산 시장을 빠져나왔다. 이별을 고하는 도화의 얼굴에 대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이수 역시 기자처럼 길을 잃어버린 마음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비행운』(2012)의 단편 「서른」에도 길을 잃은 어른이 등장한다. 서른이라는 나이를 이름 앞에 달게 된 ‘수인’은 재수 시절 같은 독서실을 썼던 언니 ‘성화’로부터 어느 날 연락을 받고 답신을 쓴다. 불문과를 졸업하고 취업난에 허덕이던 수인은 전 애인의 소개로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게 되고, 옛 학원 제자인 ‘혜미’를 저 대신 그곳에 밀어 넣고 나서야 겨우 탈출한다.

수산 시장을 나와서 이수와 도화가 처음 만났던 강남교회를 지나친 기자는 한 골목에 멈춰 섰다. 어느 골목에 멈춰서더라도 당연하다는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독서실과 고시원, 그리고 학원들. 두꺼운 책을 품에 안고 고시원에서 나와 비적비적 발걸음을 옮기는 어려 보이는 얼굴들. 기자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전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기자가 서 있는 곳을 지나는 이들과 기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또 다른 이들. 이 많은 인파 중, 꼭 수인과 성화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수인은 편지를 쓰면서 합격해야 탈출할 수 있는 섬이기에 ‘노량도’라고 불리던 노량진에서의 추억을 떠올린다. 힘든 수험 생활 중에서도 제법 즐거웠던 성화와의 추억, 수험 생활 이후 실패로 점철된 20대의 기억까지. 저 대신 다단계 회사에 남은 혜미는 파탄 난 인간관계와 빚더미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 시도를 한 뒤, 식물인간이 됐다.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집을 옮긴 수인은 죄책감 속에 묻혀 살게 된다.

성화는 그런 수인에게 엽서를 보낸다. 성화의 결혼 소식과 함께 날아들어 온, 10년 전 빵집 카드 위에 또박또박 적어놓은 수인의 이름. 수인은 먼 과거에서 배달된 제 이름을 보자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말한다. 자신은 고맙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이라고, 오늘 언니에게 무얼 받았는지 전하기 위해 쓰고 있다는 편지는 어느덧 하나의 고해가 된다.

▲노량진동의 한 골목
▲노량진동의 한 골목

열차가 노량진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성좌 중 어느 한 점, 유난히 흔들리며 약하게 빛났던 작은 별에 깃든 이야기. 노량진. 좌절된 꿈처럼 그곳을 감싸 안고 있던 성운과 고운 색의 먼지들.

 

다리 량(梁)과 나루터 진(津)이 동시에 들어간 곳. 노량진은 정말 모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일까. 그렇다면 왜 스무 살의 아영도, 서른 살의 수인도, 그리고 이곳에서 한 시절을 흘려보낸 수많은 이들도 여전히, 계속해서 이곳을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이수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오면서도 ‘이수는 이제 어디로 갈지’ 생각하던 도화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딘가를 계속 떠돌고 있는 그 이름 모를 젊은이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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