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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바람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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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바람 분다.”

11월이 되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 기자는 이런 표현으로 계절의 변화를 말하곤 한다. 수능을 치른지 3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수능이란 어째서인지 매년 이맘때쯤 기자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너무 더웠던 지난 10월 말, 11월 초에는 왜 수능 바람이 안 부나 했는데 며칠 전부터 어김없이 추워졌다. 목도리 없이는 돌아다닐 수 없고 주눅 든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걷는 그 계절이 와 버린 것이다. 그렇다. 수능이 다가온 것이다. 2023년에도 어김없이 수능은 치러진다. 그리고 지금, 수능 바람이 분다.

기자는 수능을 세 번이나 봤다. 지난 기억은 미화된다고 하던가. 남들보다 조금 길었던 그 삼수 기간은 기자에게 어째서인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괴로웠다. 분명 괴로웠다. 그렇지만 괴로운 기억은 제법 희미해지고 따뜻한 기억은 꽤 선명하게 남아있다. 수능 바람이 가져온 기억을 더듬으며, 그 당시 기자를 충만하게 만들어줬던 것들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기자는 재수, 삼수 시절 집 근처 도서관과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를 했다. 아침 일찍 눈 뜨고 대충 끼니를 때운 후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다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미술활동보고서를 쓰고 귀가 후 잠들었다. 거의 매일 반복된 재미없고 싫증 나는 일상에서도 확실한 행복은 분명히 있었다.

기자가 다니던 도서관 근처 식당 사장님께서는 어느 순간부터 기자를 알아보셨다. 같은 시간에 항상 몇 가지 메뉴를 돌려 주문하는 기자에게 사장님은 자주 말을 걸어오셨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칭찬해 주시며 새콤달콤하게 잘 익은 귤을 건네주시곤 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귤을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만지며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겨울에는 수능 말고도 귀여운 귤이 나를 반겨주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제법 다른 느낌의 계절감을 맛보곤 했다. 공부를 마친 후, 늦은 밤 버스 타러 가는 길에는 가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갓 신입생이 된 친구들과 어엿한 2학년 선배가 된 친구들의 목소리에는 곧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는 응원이 담겨있었다. 대학 생활에서의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너도 곧 이 괴로움을 맛볼 테니 긴장하라는 농담도 큰 위로가 됐다. 어쩌다 만나 밥을 먹고 계산하려던 참에 내 지갑을 낚아채며 자신의 카드로 계산하던 친구의 과장된 모습은 그날 먹은 마라탕 국물보다도 따뜻했다. 몇 시간 동안 그린 그림을 같이 평가받고 울적해하다 저녁 시간이 되자마자 맛있는 걸 먹으러 함께 달려 나가던 미술학원 동생들도 기자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현재에 충실한 기자의 모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 번의 수능 내내 아침 일찍 일어나 추운 주방에서 따뜻한 도시락을 만들어 주시던 엄마도, 그리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대학에 합격했을 때 기자보다 더 기뻐하며 기자를 맞이해 주시던 가족들 모두 미처 의식하지 못하던 기자의 단단한 내면과 행복을 끌어내 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다.

기자의 따뜻한 기억을 채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몸 구석구석 가득 채워 기자를 움직일 수 있게 했던 그 음식들. 그리고 그것들보다 더 따뜻하게 기자의 곁에서 아픈 기자의 속을 데워 준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없었더라면 기자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기자는 곧 3학년을 마친다. 취업 준비를 위한 예열의 시기인 만큼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입시처럼 비교적 명확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과 다른 시기에 다른 방향으로 쓸쓸하고 괴로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지금껏 겪은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자는 지난 20대 초반, 수능을 준비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직도 잔열을 남기고 있는 그 추억들을 한껏 끌어안는다. 이제 곧 불어올 ‘취업 바람’이 불어오는 때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지속된다. 그리고 기자는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떠올릴 것이다. 2023년 11월 어느 날 오후, 수능 바람이 따뜻한 온기를 싣고 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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