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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편지의 만남: 조선시대의 문안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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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훈민정음 언해(諺解). 어제(御製) 서문을 한글로 옮긴 부분이다. 
▲(그림1) 훈민정음 언해(諺解). 어제(御製) 서문을 한글로 옮긴 부분이다. 

편지는 가장 보편적인 글쓰기 형태 중의 하나로, 초보적인 수준의 어휘력과 문장력을 가진 사람도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다. 따라서 편지의 역사는 문자 보급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글 창제 이전의 우리나라에서는 한자가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유일한 문자였다. 그런데 한자는 각 글자가 고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의문자(表意文字)로서 짧은 시간 안에 익히기가 어려웠으며, 한자를 활용한 한문 또한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문사철(文史哲)의 중국 고전을 섭렵하며 익혀야 했기에 유한(有閑) 계층이 아니고서는 쉽게 배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전에는 상층의 남성을 제외하고는 글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이 시기의 편지는 대부분 이들이 쓴 한문 편지이다. 

15세기 중반 한글의 창제와 반포는 한민족의 문자 생활, 나아가 문학과 예술의 지형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언급한 한자 사용의 문제점, 곧 한자를 이용해서 우리의 말소리를 정확히 기재하기 어렵고, 한자를 익히지 못한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한 점이 한글의 확산을 통해 점차 해결되어 나갔다. 구전(口傳)을 통해서 유통되던 노래, 이야기, 연극 등이 원형 그대로 기록되고 새롭게 창작되기 시작했으며, 한문으로 기록된 지식도 언해(諺解), 곧 한글 번역을 통해 보다 많은 계층과 성별의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편지의 역사’도 달라졌다. 한글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은 한글 창제 후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16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한글 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도 이 시기의 것이며, 이후의 한글 편지는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편지의 역사는 16세기 중반을 경계로 한문 편지의 시대에서 한문 편지와 한글 편지가 공존하는 시대로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궁중에서는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글 사용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궁중의 비빈(妃嬪)들이 한글을 자주 사용했고, 연산군(燕山君)이 한글을 아는 여성만 궁녀로 뽑았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궁중 여성들은 한글 창제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편지 또한 일찍부터 오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보면 1452년(단종 원년)에 이미 궁녀들이 궁 바깥의 별감(別監)들과 한글 편지를 통해 정을 나누고 있다. 일종의 연애편지를 주고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지는 현재 전하지 않고, 오늘날 궁중의 한글 편지라 할 만한 것은 대부분 왕족과의 사이에서 오간 것이다. 궁중의 한글 편지는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며 발신자 및 수신자도 명백하다. 또, 궁중사와 궁중 인물에 대한 기왕의 자료가 풍부하므로 발신일이 명확하지 않은 편지도 내용의 정황을 미루어 발신일을 추정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는 민간의 한글 편지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궁중의 한글 편지들은 낱장으로 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어필첩』(御筆帖) 또는  『신한첩』(宸翰帖)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편이 함께 묶여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편지는 주로 궁중에서 궁중 밖으로 나간 것들인데, 이는 민간의 물건을 궁중에 남겨두지 않는 풍습 때문에 궁중으로 들어간 편지는 없애거나 답장을 같은 종이의 여백에 써 내어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 편지 가운데는 왕후와 출가한 딸들 사이에 오간 것이 많지만, 왕이 쓴 것도 종종 포함되어 있다. 

▲(그림2) 효종(孝宗)이 셋째 딸 숙명공주(淑明公主)의 문안지에 쓴 답장.
▲(그림2) 효종(孝宗)이 셋째 딸 숙명공주(淑明公主)의 문안지에 쓴 답장.

이러한 편지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문안지’ (問安紙)와 그에 대한 답장이다. 문안지는 말 그대로 아침 저녁의 문안 인사를 대신하여 오간 한글 편지로, 특히 어른을 직접 뵙고 인사를 드리기 어려운 경우에 쓰는 것이었다. 문안지를 쓰는 풍습은 궁중의 여성들과 궁중에 드나드는 양반가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성종대(成宗代) 이후에는 거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성종(成宗)과 중종(中宗) 대의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에 문안지를 전하기 위해 출입하는 노비인 ‘문안비’(問安婢)가 너무 많다거나, 문안비가 매일 궐내에 모여들어 소란스러우니 5일에 한 번만 문안지를 받자고 건의하는 내용 등이 보인다. 문안지는 밤 사이의 안부와 직접 만나지 못하는 섭섭함, 그리고 간단한 근황 등을 주 내용으로 하였기에 일정한 투식(套式)이 있어 천편일률적인 내용이 되기 쉬웠다. 때문에 효종은 하가(下嫁)한 넷째 딸 숙휘공주의 문안지에 대한 답장에서 ‘너희들은 셋이 똑같은 말로 글을 적어 너무나 정성이 없으니 다음에 또 이렇게 하면 안 받을 줄 알아라’라고 말하며 성의 없는 문안지에 역정을 내기도 했다. 

양반가의 예법은 궁중을 모범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문안지는 궁중에 드나드는 여성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반가로 퍼져나갔다. 한글 편지가 양반가의 풍습으로 자리잡으면서 상층 여성들의 한글 편지 쓰기는 그 집안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지체 있는 집안의 딸들은 7~8세 무렵부터 한글을 배우고 궁체(宮體)를 익혀 문안지 쓰는 연습을 하였으며, 각 집안에는 대대로 전하는 일종의 ‘편지첩’이 비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편지첩을 만들고 어린 딸들에게 그것을 필사시킨 것은 문안지를 쓰는 기본적인 요령은 물론 글씨체를 포함한 편지의 갖은 격식이 여성의 품위, 나아가 집안의 품위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시가에서는 며느리를 통해 사돈 집안을 평가하게 마련이었으므로 혼기가 찬 딸들은 특히 이런 교양 교육을 엄격히 받았다. 양반가의 문안지는 궁중에서처럼 매일 오간 것은 아니며 분가(分家)를 했을 경우나 친정에 다니러 갔을 때 주로 많이 썼다. 며느리는 시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라면 아침 저녁의 인사를 대신해 문안지를 써야 했고, 이는 조선시대 여성의 주요한 의무 중의 하나였다.

19세기 말에 출생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의하면 반가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5~8세에 어머니나 할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워서 10세 무렵에 문안편지 쓰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한글은 대체로 집안의 여성들 사이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 볼 때 16세기 이후로 바느질·조리 등의 가사노동과 예의범절 외에 한글 학습이 여성 교육의 필수적인 항목으로 자리잡았고, 그 주된 목적은 편지를 쓰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글 학습 및 문안 편지 쓰기가 여성을 위한 일종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는 문안지 쓰기를 통해 여성의 문해력(文解力)이 확장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바 여성이 글을 읽고 쓰는 것에 소극적이었던 이전의 사회적 관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시와 소설 같은 문학은 한글로 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여성에게 권장되지 않았던 반면 한글 편지 쓰기는 양반의 예의범절과 관련하여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요구된 덕목이었다. 

▲(그림3) 윤덕희(尹德熙, 1685~1776), '책 읽는 여인', 20×14.3㎝, 서울대박물관
▲(그림3) 윤덕희(尹德熙, 1685~1776), '책 읽는 여인', 20×14.3㎝, 서울대박물관

문안지 쓰기가 궁중에서 반가로 확산되면서 한글의 보급과 한글 편지의 보급은 동시에 가속화되었다. 궁중과 양반 가문의 여성에 한정되었던 필자층도 확대되어 한미한 가문이나 지방의 여성까지 한글 편지를 쓰게 되었으며, 중인 계층 남성 및 여성과 편지를 주고 받은 양반 계층 남성도 점차 한글 편지의 필자로 편입되었다. 한글이라는 문자는 편지라는 글쓰기 방식을 만나 이와 같이 문자 생활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을 견인하며 조선 사람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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