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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청년들의 초상, '초록물고기'(1997)

너는 아직도 헤엄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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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역의 출구 표지판. 왼쪽으로 가도 오른쪽으로 가도 일산신도시이다.
▲대곡역의 출구 표지판. 왼쪽으로 가도 오른쪽으로 가도 일산신도시이다.

기자의 기행(紀行)은 기차 위에서 시작한다. 햇빛 한 줄기 없는 우중충한 날씨와 함께 수도권 전철 3호선 열차를 탔다.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의 촬영지에 다녀오기 위해서다. 수도권 전철 3호선의 일산선은 일산과 서울을 이어주는 몇 안 되는 지하철 노선으로, 일산이 1기 신도시로 지정되면서 1996년 노선이 확충됐다.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기 시작한 이 때가 <초록물고기>의 시대적 배경이다. 영화는 군대에서 막 전역한 26살 청년 ‘막동’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변해버린 고향에 적응하려 애쓰는 청년을 비춘다. 그중에서 대곡역은 막동이 본가로 가기 위해 도착한 역으로 등장한다.

대곡역은 수도권 북서부의 유일한 지하철 환승역이다. 그래서인지 내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모두 환승 게이트로 발을 옮길 뿐, 정작 출구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대곡역 주변은 근처 다른 곳에 비해 거주자가 적기 때문인 듯 했다. 역에서 나온 막동이 향한 본가 앞에는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고, 집에는 어머니와 몸이 아픈 큰형이 살고 있다. 막동은 당장 돈도 능력도 없으면서 괜히 어머니에게 더 큰 세상으로 나가 돈을 많이 벌겠다고 큰소리친다.

 

막동: 동네가 너무 많이 변했어. 신도시 들어서고 나서 확 찌그러져가지고.

셋째 형: 전엔 뭐 별거 있었냐.

막동: 그래도.

 

▲막동과 셋째형이 달걀을 팔던 장소다. 낙엽 청소기의 위잉, 윙 소리가 들린다.
▲막동과 셋째형이 달걀을 팔던 장소다. 낙엽 청소기의 위잉, 윙 소리가 들린다.

막동은 돈을 벌기 위해 계란을 파는 셋째 형을 따라 신축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는 형을 거들기는커녕 지금 아파트가 서 있는 곳이 예전엔 아카시아 밭이었지 않냐며 툴툴댄다. 영화는 과거 막동이네 집이 살던 동네가 이주민의 땅이 되었고, 반대로 토박이었던 막동이와 셋째 형은 계란을 팔기 위해 그곳을 잠시 들러야 하는 이방인이 됐음을 비춘다. 영화 속 배경은 대화역 3번 출구 앞에 위치한 장성마을 1단지다.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관찰한 일산은 영화가 촬영된 시점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신축인 게 티가 날 정도로 번쩍거리던 아파트는 생기를 잃었고, 이제는 계란 파는 상인도 오지 않는다. 퇴근 시간대가 다가오는 평일 오후의 일산은 조용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학생이거나 주부이거나 노인이었다. 경비 아저씨도 하릴없이 바람이 나오는 낙엽 청소기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막동은 성공을 열망하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어느 날, 막동이가 첫눈에 반한 여자 ‘미애’와 그녀의 약혼남이자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 ‘배태곤’은 막동에게 조직의 조무래기로 일할 것을 권한다. 능력도, 돈도 없었던 막동은 별 고민 없이 수락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착실하게, 계획적으로, 악착같이 해낸다. 임무 수행을 위해 자기 손가락을 일부러 부러뜨릴 정도였다. 성공을 향한 독기로 가득 찬 막동이 태곤의 신임을 얻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막동은 조직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곤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라는 말까지 듣는다. 조직의 진정한 일원이 된 것이었다.

 

태곤: 막동아. 내가 옛날 얘기 하나 해줄까. 옛날에 말이야. 새까만 양아치 새끼가 하나 있었어요. (중략) 너무 배가 고파서 밤에 식당 문을 따고 들어가서 김밥 세 줄 먹고 오뎅 국물 마시다가 주인한테 들켜서 작살나게 터지고 첫 번째 유치장 신세 졌지. 그 김밥집이 어딘지 아냐? 바로 여기야. 그리고 그때 김밥 훔쳐 먹은 양아치 새낀 지금 뭐가 됐을 거 같냐? 이 건물 전체 재개발 건을 따내서 여기다가 멋진 건물을 지을라 그러지.

 

한편, 태곤의 조직폭력배 선배인 ‘김양길’은 태곤의 근거지 옆에 새로운 나이트클럽을 차려 운영을 시작한다. 사실상 조직 간의 전쟁 선포였다. 태곤은 얼마 안 가 양길이 차린 나이트클럽에 고객들을 뺏기고 만다. 이로 인해 두 조직은 패싸움을 벌이는 등 갈등을 빚지만, 결국 태곤은 양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조직이 벌이는 정치 싸움에 지친 막동은 가족들을 찾는다. 하지만 가족들도 막동에게 편안함을 주지는 못한다. 방황하는 막동이 결국 찾은 사람은 미애였다. 미애도 막동을 원했다. 태곤과 약혼했지만, 태곤의 억압과 구속에 질린 것이었다. 미애는 그런 태곤 대신 번번이 자신을 구해주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막동에게 마음이 갔다. 둘은 밀회하고 밀애했다.

 

태곤: 막동인 꿈이 뭐라 그랬지?

막동: 식구들하고 같이 살면서 조그만 식당 하나 같이 했으면 좋겠네요.

태곤: 좋지. 나도 그 꿈 하나에 매달려서 저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어. 그냥 공짜로 올라온 거 아니야.

 

막동은 결국 사람을 죽였다. 화장실에서 양길을 칼로 찔러 죽인다. 막동의 손과 얼굴엔 피가 가득 묻었고, 바닥 역시 빨갛게 물들었다. 그렇게 막동의 순수는 더렵혀졌다. 바닥을 물로 벅벅 닦아보지만 피는 더 번질 뿐이다. 막동은 현장에서 도망쳐 나와 공중전화부스에 들어간다. 털썩 주저앉아 울먹이며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건다. 

 

막동: “여보세요. 여보세요? (중략) 큰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으로 물고기 잡으러 많이 다녔었잖아. 내가 저 언젠가 초록색 나는 물고기 잡는다고 그러다가 쓰레빠 잃어버려 가지구, 큰성이랑 형들이랑은 하루 종일 놀지도 못하고 쓰레빠 찾으러 다녔었잖아. (중략) 큰성, 그때 생각나? 그때 생각나?”

 

영화 말미, 막동은 태곤의 손에 죽는다. 미애와의 밀애를 들킨 것이 죽어야 하는 이유였다. 순수했던, 그저 성공하고 싶었던 청년은 결국 죽었다. 영화 내내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던 막동의 가족은 어머니 집에 모여 식당을 차린다. 가게 이름도 집 앞에 심어진 큰 버드나무에서 따와 ‘큰나무집’이라고 정했다. 끝내 이루지 못했던 막동의 꿈은 가족의 일상이 됐다. 그리고 어느날 태곤과 태곤의 아이를 임신한 미애는 큰나무집에 들어가 음식을 시킨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식당. 막동의 가족은 임신한 미애에게 몸보신을 위한 닭 한마리를 내놓는다. “또 오세요! 잘해드릴게.”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은 태곤과 미애에게 다시 오라는 인사를 한다.

▲백석교회 근처. 
▲백석교회 근처. 

큰나무집이 있던 막동의 집은 현재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버드나무도 뽑혀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면 끄트머리에 모습을 보이던 백석교회만이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차 하나 다니지 않는 시골이던 교회 주변은 수십 개의 트럭이 줄지어 다니는 인쇄단지로 변해있었다. 돌이켜보면, 기자가 따라갔던 모든 촬영지 중 성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소실되거나 변했다. 다 어디 갔을까. 번쩍거리던 신축 아파트는, 하늘거리던 버드나무에 터를 잡고 살던 막동의 가족과 그 이웃들은.그 시절 청년들의 초상이던 막동이는 순수한 초록물고기가 되어 계속 헤엄치고 있을까. 

▲막동이 말한 빨간 철길. 지금은 이 길로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막동이 말한 빨간 철길. 지금은 이 길로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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