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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따라 간 유배길: 『건거지(巾車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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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건거지』표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건거지』표지

유배(流配)는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어 거주지와 가족 및 지인으로부터 격리하는 형벌로, 귀양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유배형을 받은 죄인은 주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가문에 속한 인물들이었고, 따라서 유배는 기본적으로 남성 사대부에 대한 정치적 추방과 징벌의 성격을 띠었다. 그렇다면 여성이 유배를 가는 일은 없었을까? 흔치는 않았지만 집안이 큰 정쟁(政爭)에 휘말리거나 특히 역모에 연루되는 경우 여성이 유배형을 받는 일이 있었다.

왕실의 여성은 유배와 거리가 멀 것 같지만, 궁중의 암투에 뛰어들거나 휘말린 여성들은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의 모친인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盧氏)는 역모 사건으로 인해 남편과 세 아들,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잃은 후 딸인 인목왕후마저 폐모(廢母)된 상황에서 제주로 유배되어 관비 생활을 하였고, 영조가 총애했던 딸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1808)도 정조의 즉위 후 강화도 교동부로 유배를 갔다.

이 글에서 소개할 분성군부인(盆城郡夫人) 허씨(許氏, 1645~1723) 또한 왕실의 여성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 1644~1665)의 부인이다. 허씨는 유배형을 받은 자녀를 돌보기 위하여 유배지에 동행하여 생활하였으며, 자신과 두 아들에게 닥친 정치적 시련과 이은 유배 생활을 『건거지(巾車志)』라는 글로 남겼다. 앞서 살핀 것처럼 여성 가운데도 유배를 경험한 이들이 있었으나, 그 경험에 대한 여성 자신의 기록은 물론 타인의 기록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간혹 단편적인 기록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유배를 떠나게 된 경위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그치고 있어 그러한 기록을 통해 여성의 유배 생활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에 『건거지』는 여성의 유배 생활 전반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건거지』의 이야기는 인조(仁祖)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姜氏)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비롯된다. 병자호란 후에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 부부는 그곳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현안들을 유능하게 처리하며 큰 신망을 얻는다. 그러나 귀국 후 소현세자는 독살로 의심되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세자빈 또한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죄목 등으로 인해 사약을 받게 된다. 소현세자 부부에게는 석철(石銟), 석린(石麟), 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강씨가 죽은 이듬해인 1647년에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석철과 석린은 1년 만에 목숨을 잃고 석견만이 살아남게 된다. 목숨을 부지한 셋째 아들 석견이 바로 『건거지』의 작자 허씨의 남편이 되는 경안군 이회이다.

경안군은 제주를 떠나 강화와 교동에서 유배 생활을 이어 가다가 1656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다. 이후 경안군은 허씨와 혼인하여 임창군(臨昌君, 1663~1729)과 임성군(臨城君, 1665~1690) 두 아들을 두었는데, 경안군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임창군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글이 나돌면서 임창군과 임성군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때 허씨는 두 아들의 유배길에 동행하였으며, 먼 훗날 70세가 되던 1715년에 유배에서 해배(解配)1) 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회고하여 『건거지』를 쓰게 된다. ‘건거’는 죄인이 타는 수레를 뜻하는데, 이 말에는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겪은 정치적 시련과 인생의 고난이 함축되어 있다.

1679년 강화도에서 흉서(凶書), 곧 반역을 도모하는 글이 적발되자 임창군과 임성군 형제는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제주도에서의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게 된다. ‘위리안치’란 집을 둘러싼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여 죄인의 통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유배형 가운데서도 가혹한 것이었다. 또한 제주도는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행로가 험난했으며, 고립된 섬이었기에 중죄인을 서울에서 격리하여 통제하기 쉬운 유배지였다. 『건거지』의 기록에 의하면 허씨 부인과 두 아들은 과천-천안-공주-태인-나주-정읍-강진-완도-추자도의 경로를 거쳐 제주에 도착한다. 강진에서 완도에 이르는 여정에서 일행은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의 일을 허씨는 ‘아이들을 돌아보니 각각 쓰러져 한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저 어린 것들이 어찌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가련한 모습을 내게 보이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갈가리 찢어져 탄식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나도 몰래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허씨가 자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표현하는 대목들은 다른 유배 문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거지』의 고유한 개성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해동지도』 (海東地圖) 중 제주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해동지도』 (海東地圖) 중 제주도

필자인 허씨뿐 아니라 며느리이자 임창군의 아내인 밀양 박씨도 함께 유배길에 나서는데, 유배지에서의 고부(姑婦)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임창군의 아내 박씨가 제주에서 딸을 출산하자 허씨는 ‘내가 항상 종실(宗室)에는 아들이 귀하지 않으니 딸을 낳아 나의 괴로움을 위로해달라고 하였는데 12월에 딸을 낳았다. 내 소원이 정말 이루어져서 큰 경사가 난 것처럼 기뻤다.’라고 기록하였다. 딸을 원한다는 대목은 소현세자 이래 삼대를 이어온 ‘아들’의 슬픈 역사에 대한 한(恨)과 애도를 담고 있다. 유배지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손녀의 삼대가 함께 지낸 것은 유배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롭고 꿋꿋한 장면이다. 임창군 형제가 유배지를 옮겨가는 바람에 박씨는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어린아이를 데리고 먼 거리를 이동하기도 하고, 젖이 부족하여 마을의 여성들에게 젖을 얻어 먹이기도 하면서 출산과 양육이라는 ‘일상’을 견뎌내었다.

한편 『건거지』에는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들 특히 하층 계급과의 만남에 대한 내용이 자주 보이는데, 이 가운데 제주 여성과의 만남과 교류가 특히 눈에 띈다. 허씨가 제주도에서 처음 만난 여성은 심부름꾼으로 온 여자 노비인 ‘단화’와 ‘백승’이다. 이들에 대해 허씨는 ‘저고리가 짧아 가슴을 감추지 못하고 치마 역시 짧아서 다리가 모두 드러났다. 날이 개면 행주치마를 앞에 두르고 있다가 비가 오면 벗고 벙거지를 쓰고 다니니 추한 행동이 완연히 사내 같아서 볼 때마다 놀라웠다.’라고 쓰며 낯선 감정을 표현하였다. 허씨는 제주 하층 여성의 자유분방하고 꾸밈없는 모습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지만, 이들을 질책하거나 거부하지는 않는다. 한편 허씨는 병으로 인하여 홀로 서울로 떠나오면서 들른 시루섬에서 준치회와 낙지볶음을 대접받는데,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떠나온 괴로움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를 알아차린 한 노파가 고기를 준비하여 ‘이것을 돌아가는 배편에 부치면 저녁에 제주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드시기 바랍니다.’라고 위로하자 허씨는 감격하여 겨우 식사를 한다. 이처럼 허씨는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고 공감해주는 유배지의 여성들에게 점차 감화를 받고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보여준다.

『건거지』의 기록은 1679년 봄에 시작하여 민회빈(愍懷嬪) 강씨2)가 신원(伸寃)3) 되고 후손들이 유배에서 풀려난 1718년에 끝난다. 임창군 형제는 제주, 해남, 삼척을 거쳐 약 5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허씨도 3년이 넘는 기간을 유배지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유배가 끝난 후의 후일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거지』의 마지막 부분은 맏아들 임창군의 벼슬, 둘째 아들 임성군의 혼인 등을 통해 지난날의 고난이 해소되고 일족(一族)의 지위와 명예가 회복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건거지』의 자취는 지금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허씨 부부, 임창군 부부 그리고 임성군 부부는 각각 합장되어 그 묘가 모두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일대에 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에도 경안군과 허씨의 사연을 만날 수 있다. 송광사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의 복장(腹藏) 유물 중에 저고리에 기록된 발원문이 있는데, 여기에 ‘慶安君兩位壽命長遠’(경안군양위수명장원), 곧 경안군 부부의 장수를 기원하는 글귀가 있는 것이다. 이 불상은 경안군 내외를 가까이서 지켜본 것으로 추정되는 궁중 나인들이 조성한 것인데, 어쩌면 허씨와 자녀들이 오랜 고난을 이기고 복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나인의 염원이 부처에게 가닿았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된다.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허씨와 경안군 합장묘 전경/사진제공: 고양시청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허씨와 경안군 합장묘 전경/사진제공: 고양시청

 

1)유배에서 풀림

2)허씨의 시어머니이자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강씨를 가리킨다

3)원통한 일이나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풀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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