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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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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강렬한 입맞춤에 눈이 부시고 매미의 노래가 귓가에 고여 멍멍한 여느 때의 한여름, 필자는 친한 친구와 LA를 다녀왔다. 약 1년 정도 경비를 모으며 계획한 주체적인 첫 해외여행이었고, 이것만을 바라보고 봄학기를 달린 우리는 종강하고부턴 여행 준비에 매진하며 방학을 보냈다. 마침내 8월 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11시간의 장거리 비행 끝에 태평양 건너편, 축복받은 땅 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우린 먼저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 주로 이동했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내려서 본 보랏빛 하늘과 트럼프 호텔은 우릴 영원히 이 향락의 도시에 가두려는 누군가의 속임수가 분명한 비현실적인 절경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일정을 마친 후 3일 차에 다시 LA로 넘어왔다. 친구와 나는 여유 없는 경비 사정이라 쓰고 “우리 것이 최고다.” 라고 읽는 명분으로 LA 한인타운 변두리의 민박집에서 남은 여행의 숙박을 모두 해결했다. 사장님은 60대 여성분이었는데, 30년 전 자녀분들의 교육 문제로 LA에 이민을 오셨고, 지금은 자식들이 각자 가정을 이루며 떠나 적적함을 달래고 생활비에도 보탤 겸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셨다. 숙소 근처를 돌아다니다 가장 궁금했던 한인타운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LA가 아무리 이민자의 도시라 불려도 한인 커뮤니티는 매우 좁고 왕래하는 관계 또한 한인 교회 분들뿐이라 한인타운 밖을 나갈 일은 거의 없다고 하셨다.

그러다 몇 년 전, 혼자 남게 된 사장님은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셨는데, 강산이 3번은 변했을 그 간의 세월은 사장님이 알던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지워갔고 낯섦과 어색함만이 그 시간의 공백을 채워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귀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한 부동산 사기는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아 한국으로 들어오시는 건 아예 포기했다고 하셨다. 담담히 말해주신 이야기였지만 사장님의 얼굴에 스친 고향을 잃은 사람의 씁쓸한 표정에 필자는 꽤 마음이 아팠다.

7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행 비행기에서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2020)를 보았다.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화제가 되었던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1세대 한국계 이민자의 이야기로 미국 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의 쾌거를 이루어낸 영화지만, 사실 한국 내에서는 큰 공감을 받지 못했다. 한국은 토착민이 절대적 비율을 이루고 있고, 이 영화의 주제는 이민자를 위해, 이민자의 이야기로 건네는 위로라 볼 수 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필자 역시 뉴스에서 윤여정 배우의 수상 소식 정도를 본 기억은 나지만, 크게 관심이 갔던 영화는 아니었다. 미국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민박집에 머물지 않았더라면,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온전하게 이 영화의 의도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미나리>는 민박집 사장님의 삶과 매우 닮아있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시골에서 태어나 논과 밭의 품에서 자랐고, 지금은 홀로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로 날아와 지내고 있다.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집은 어디인가?’에 대한 혼란과 이곳에 스며들고자 하는 열망이 뒤엉키는 것이다. 마치 지붕 없는 길가에 홀로 핀 민들레 같다. 사장님과 <미나리> 속 제이콥 가족의 애환이 필자에게 더 깊이 스며들었던 것은 아마 서울이라는 도시 속 여전히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 모두 그곳의 견고하게 박힌 나무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엔 홀로 뿌리를 내렸고 마침내 꽃을 피운 민들레가 되었듯, '나'라는 민들레 홀씨도 서울 이곳에 뿌리내려 꽃을 피우고자 한다. 세월이 흘러 꽃은 지고 다시 민들레 홀씨가 되어, 흩날리다 닿게 된 새로운 곳에서 뿌리를 내리겠지. 

"세계를 유랑하고 삶을 유영하자." 이번 여행이 필자에게 열어준 새로운 삶의 목차이다. 최대한 많은 것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자. 마음에 존재하는 공감의 크기는 경험의 가짓수가 결정한다는 교훈과 함께.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게 될지, 삶의 방향이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결국은 꽃을 피우게 될 세상의 모든 민들레 홀씨를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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