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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여행한 옛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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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금강전도'(金剛全圖)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금강전도'(金剛全圖)

금강산은 우리 선조들이 가장 선망한 여행지였다. 금강산에 대한 동경, 그리고 금강산을 방문한 이들의 만족과 자부는 고려시대 이래의 숱한 여행기와 한시, 가사, 그리고 근대의 기행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금강산 여행의 기록은, 마치 오늘날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여행의 경험이 공유되는 것처럼 널리 전파되어 금강산에 가려는 이들을 위한 여행의 길잡이가 되거나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이들이 간접적으로 금강산을 체험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였다. 

금강산 여행이 본격화된 조선시대에 금강산을 유람한 이들은 주로 부유한 사대부 남성이었다. 사대부 남성들은 유람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와 운신(運身)의 자유, 산수를 즐기기 위한 명분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다만 여기에 경제적 여유가 반드시 더해져야 했는데, 이는 금강산이 관동(關東)에 치우쳐 있어 유람에 상당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은 금강산 유람을 하기 어려웠으며, 여성들은 여기에 외출을 금하는 사회적 규율이 더해져 금강산에 가보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여성들도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이나 전언(傳言)을 통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접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실제로 금강산을 방문한 이도 있었다. 

여성이 금강산을 방문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여성들은 대부분 불교 신자였으며 일상과 신앙을 함께 영위하였다. 고려 여성들의 불교 신앙은 염불과 참선, 독경(讀經) 등의 개인적 수행의 형태를 띠기도 했지만, 사찰에서 개최하는 모임에 참석하는 공동체적 수행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여성들은 지리산, 청량산 등의 유명한 사찰이 있는 산을 방문하였으며 그러한 활동의 정점에는 금강산이 있었다. 금강산은 수려한 경관 및 수많은 절과 암자로 인해 불가의 ‘성역(聖域)’으로 여겨졌고, 나이와 신분,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수많은 여성들이 금강산을 방문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여성이 금강산을 방문한 사례가 오히려 적어진다.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점차 강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절에 가는 여성이나 산천을 유람하는 사족 여성을 장(杖) 100대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성들이 사찰을 방문하거나 산에 가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 사정 때문인지 조선 전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금강산을 방문한 사례는 황진이의 일화가 거의 유일하다. 황진이는 금강산이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재상가의 자제인 이생을 설득해 함께 떠난다. 두 사람은 하인 없이 간소한 차림으로 다니며 걸식을 하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얻기도 하며 약 1년 동안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황진이는 시와 가무로 유명했던 기녀(妓女)이다. 외출이나 여행이 크게 제한되어 있었던 다른 여성들과 달리 기녀들은 금강산을 비롯한 명산을 유람할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진이 이후에 금강산을 방문한 여성으로는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이 있다. 김만덕은 기녀 출신으로 정조 대에 제주도를 휩쓴 대기근 때 자신의 재산을 출연하여 많은 제주 백성의 목숨을 구한 인물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정조가 만덕의 행적을 치하하여 그 소원을 묻자 ‘다른 소원은 없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한번 서울에 들어가 임금이 계신 곳을 멀리 바라보고, 이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를 허락하여 여행의 편의를 돕도록 지시했으며, 만덕은 제주 여성으로는 최초로 금강산을 여행하게 된다. 만덕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에서 금강산 유람이 크게 유행하던 때로, 이러한 분위기가 제주도까지 전파될 정도로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원 김씨(錦園 金氏, 1817~?)의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사진제공:연세대학교)
▲금원 김씨(錦園 金氏, 1817~?)의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사진제공:연세대학교)

사대부 남성들은 금강산을 유람할 때 짐꾼이나 하인은 물론 지체가 낮은 문인이나 악공(樂工), 그리고 기녀를 대동하기도 하였다. 만덕의 금강산 여행은 임금의 포상에 의한 것으로, 사대부 남성과 동반한 기녀의 유람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지만 그 계기가 된 제주도에서의 행적은 기녀의 자유로운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만덕이 기녀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거상(巨商)이 되어 제주 백성을 구휼하는 것도, 선행에 대한 포상으로 서울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만덕은 별도의 여행기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금강산 여행은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조정의 공식적인 기록과 많은 문인들의 문집에 남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금강산 여행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금원(錦園 金氏, 1817~?) 역시 기녀의 신분으로 금강산을 방문하였다. 금원은 12세 무렵에 사대부 남성의 여행길에 동행하여 충청 지역과 금강산을 유람한 후, 의주를 거쳐 서울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을 기록한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금원은 ‘눈으로 산하의 크나큼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세상의 많은 일을 겪지 못하면 변화를 알지 못해 이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면 국량이 좁아지고 식견이 트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며, 남자가 사방을 유람할 뜻을 가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문밖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그저 음식 만드는 일이나 말해왔다.’라고 말하며 여성에게 부여된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남성과 마찬가지로 산수를 유람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금원은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던 여성들의 억눌린 욕망을 금강산 유람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 이를 기록한 최초의 여성이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여성들이 단체 여행을 가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신문사의 모객(募客)을 통해 금강산 단체 여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한데, 『동아일보』에 실린 통계에 의하면 1935년에 금강산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람은 남성이 25,414명, 여성이 835명으로, 비록 30배 가까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여성 방문객의 수가 유의미하게 많다는 점이 확인된다. 신문사가 모집한 금강산 여행단은 ‘금강산 탐승단(金剛山探勝團)’으로 불렸으며, 특별히 여성만으로 구성된 ‘부인견학단’도 존재했다.

금강산은 수학여행지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여학생들 또한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배화여고보에 재학했던 조애영(趙愛泳, 1911~2000)은 1930년 졸업반 수학여행에서 금강산을 방문하고 「금강산기행가」라는 가사를 썼다. 이 가사는 ‘어화우리 벗님네들 금강산을 구경가세 / 망태메고 포화신고 운동복에 운동모자 / 간편하게 차린행렬 삼십여명 일행이라 / 고려국에 태어나서 천하금강 한번보기 / 남자들도 소원커던 우리아니 자랑이랴’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수학여행의 일행은 30여 명이며 여학생들의 복장은 헝겊 신, 운동복, 운동모자로 소박하고 단출하다. 이들에게는 남성들 혹은 뭇사람들이 소망하고 경험하던 것을 이제 자신들이 경험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여학생들의 금강산 수학여행에서 근대 문명과 교육의 비호 아래 여성의 체험이 그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금강산의 여성 여행객들은 불자로서, 기녀로서 혹은 여학생으로서 면면한 ‘금강산의 역사’의 일부를 이루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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