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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회화 (1)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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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reet, Berlin' (키르히너, 1913)
▲ 'Street, Berlin' (키르히너, 1913)

영화의 역사는 (공식적으로는) 뤼미에르 형제(Lumière brothers)가 프랑스 파리의 그랑(Grand) 카페에서 대중을 상대로 첫 번째 상영을 했던 1895년 12월 28일에 시작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영사 행위들이 많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극장 문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중적 유료 상영이라는 점에서 이 날이 영화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기계의 발명으로 시작된 신기한 볼거리로서 영화는 19세기의 다양한 시각적 장난감들과 같은 흐름 속에 있었지만, 그 신기함이 익숙함으로 변해감에 따라 영화는 점점 문화예술의 영역에 다가가기 시작했고, 대략 1907년경부터 (그러니까 영화(cinematographe) 매체의 등장 이후 12년 정도가 지난 시점부터) 극영화가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한 영화는 다른 예술 영역들의 특성들을 수용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연극으로부터 그 다음에는 회화와 음악으로부터, 그리고 대략 192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로부터 양분을 흡수하게 된다.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연극은 영화와 가장 유사한 예술 행위인 것처럼 보였지만, 대사의 예술인 연극은 결코 (당시 영화의 물질적 형식이었던) 무성영화의 귀감이 될 수 없었다. 반면 소설은 문자로만 구성된 것이지만 이야기의 전개라는 차원에서 영화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음악은 (배경음악을 제외한다면) 영화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음악적 전개가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느낌, 즉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가장 고차원적인 영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회화는 시각예술이라는 점에서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다. (영화에 대한 영향이라는 점에서 회화와 음악은 종종 그 맥락이 겹치기도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지막 세 번째 글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이 글을 포함해서 세 번에 걸쳐 우리는 영화와 회화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첫 번째는 독일 표현주의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이하 <칼리가리>)을, 두 번째는 히치콕(Hitchcock, 1899~1980)의 <링>(1925)을, 세 번째는 한스 리히터(Richter, 1888~1976)와 발터 루트만(Ruttman, 1887~1941)의 실험 애니메이션을 다룰 것이다. 세 개의 사례 모두 1920년 즈음한 시기에 속하는데,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쯤인 1920년대는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시기들 중 하나다. 극영화 장르들의 확립, 실험영화의 등장, 유성영화의 시작, 극영화 미학의 다양화 등등과 같은 일들이 모두 이 시기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모던 영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다.) 새로운 매체이자 예술이었던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 가득했던 이 시기의 몇몇 면모들을 들춰보는 것은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사점들을 제공해줄 것이다.

<칼리가리>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표현주의는 회화와 연극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술 운동이었는데, 회화의 경우 다리파의 키르히너(Kirchner, 1880~1938), 청기사파의 칸딘스키(Kandinsky, 1866~1944), 그 외 코코슈카(Kokoschka, 1886~1980), 파이닝거(Feininger, 1871~1956) 등등이 대표적인 화가들로 언급된다. 표현주의 영화는 기존의 전통적인 예술 영역들에서 표현주의의 유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등장했다. 표현주의는 말 그대로 내면의 표현에 중점을 둔 접근법이었는데, 이를 위해 외면의 사실적 묘사는 거부되었고 내면의 무엇인가를 혹은 원초적인 무엇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용인되었다. 주로 회화에서의 날카로운 선이나 왜곡된 형태, 현란한 색채 등이 표현주의의 특징으로서  흔히 거론된다.

표현주의 연극이 표현주의 회화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세트를 사용하면서 왜곡된 연기 방식을 통해 내적 감정의 시각적 표현에 치중했던 것은 표현주의 영화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칼리가리>(1920)는 이러한 표현주의 회화의 특징을 영화의 미장센에 그대로 옮겨온 대표적인 작품이자 첫 번째 표현주의 영화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미장센(mise-en-scene)은 원래 연극에서 사용되던 프랑스어 표현인데,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무대 위에 배치하기’이다. 연극에서 영화로 계승된 이 용어가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 관련해서는 영화의 회화적 성격을 드러내는 행위를 지시하게 되었다. <칼리가리>에서 표현주의적인 성격은 시각적인 모든 것에서 드러난다. 흑백 영화이기에 회화에서처럼 색채를 활용한 표현들은 볼 수 없지만, 영화 속 공간은 온통 비현실적인 선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배우 또한 미장센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활용되어, 영화 전체는 흑백의 표현주의 회화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표현주의를 통해 평면적 조형 예술이 된 것이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영화 스타일인 ‘고전적 할리우드 스타일’이 영화 이미지의 삼차원적 환영을 강조했던 반면, 표현주의 영화는 이차원적 구성을 가장 중요한 미학적 특징으로 내보였다. <칼리가리>는 영화가 회화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한 장면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한 장면

화사에서 우리는 (표현주의나 네오리얼리즘과 같은) 여러 사조/운동들을 만날 수 있는데, 사실 어떠한 운동도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통일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작품별로 다소 다른 특성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작품들을 하나의 사조로 묶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은 늘 제기될 수 있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칼리가리>에서 볼 수 있는 회화적 표현들이 다른 표현주의 영화들에 그대로 적용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미학적 견지에서 봤을 때 첫 번째 독일 표현주의 영화인 <칼리가리>가 예외적인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에 등장하는 표현주의 영화들이 덜 비현실적인/회화적인 공간을 보여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표현주의는 현실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내면의 묘사 또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기에, 내면의 묘사는 현실 묘사의 한 방식으로, 즉 리얼리즘의 한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리얼리즘은 보통 묘사의 사실성이나 객관적 현실에 대한 탐구와 관련해서 이야기되기에, 표현주의는 이런 흐름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심지어는 반대편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칼리가리>가 도입한 회화적 표현에 관한 (대표적인 사실주의 영화 이론가인) 크라카우어(Krakauer, 1954~)의 비판이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크라카우어는 <칼리가리>가 보여준 회화적 미장센을 현실의 왜곡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양식상의 왜곡이 영화의 스토리와 긴밀하게 상응한다고 말한다.

한 남성이 옆에 있는 남성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써 전개되는 영화는 시골 장터 흥행사 칼리가리가 몽유병 환자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죽이는 것과 관련된 사건들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말미에 그 흥행사는 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원의 원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여기까지가 원작 시나리오의 내용인데, 여기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비이성적 권력에 대항하는 혁명적 기운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연출을 맡게 된 로버트 비네(Robert Wiene, 1881~1938) 감독은 구조 변경을 통해 액자 구성을 취하게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정신병자가 지어낸 망상이었고 결국 정신병원의 원장이 질서를 확립한다는 내용으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정신병원을 중심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이중으로 꼬아버린 서사 방식은 표현주의의 본래 취지인 내면의 묘사보다는 반전 및 그에 따른 정신병의 강제적 진압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크라카우어는 이 영화의 표현주의적 양식이 단순히 정신병 환자의 망상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것에 그치고 있으며, 액자 구성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던, 1차 대전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독일) 바이마르 시민들의 껍질 속으로의 퇴행을 드러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억압된 내면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출하지 못했던 독일 국민들이 1930년대에 결국 누구를 자신들의 대리인이자 지도자로 내세웠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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