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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으로의 시간여행 '중경삼림'(1995)

유통기한 하루 남은 파인애플 통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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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억을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영화 <중경삼림>은 1990년대 홍콩의 향취를 한껏 풍기는 작품으로 왕가위(王家卫, 1956~) 감독 특유의 분위기가 담고 있다. 이별을 마주한 경찰 ‘663’과 ‘하지무’, 그들 앞에 나타난 여점원 ‘페이’와 ‘노랑머리 마약밀매 중계자’. 기자는 그들이 만들어 가는 독특한 이별과 새로운 만남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에게 줄 샐러드를 사러 간 경찰 663. 가게에는 처음 보는 알바생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페이.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일하는 그녀에게 663의 눈길이 향했다. 페이 또한 663이 궁금했지만 이미 그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663은 페이가 일하던 가게 사장에게 자신의 이별 소식을 전한다. 전 여자 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는 언젠가 돌아올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루는 가게로 그의 전 여자 친구가 찾아와 편지를 남겼다. 편지는 이별을 담고 있었고 663의 집 열쇠가 담겨 있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페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663의 집을 두리번거리는데, 그 장면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 Level Escalator)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기자는 영화 촬영지를 방문했다는 생각보다 홍콩 현지인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에스컬레이터는 미드레벨 거주민들의 출퇴근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 길이는 약 800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에스컬레이터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끝도 없이 이어진 에스컬레이터와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자 페이와 663의 이야기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레이엄 스트리트 마켓
▲그레이엄 스트리트 마켓

페이는 시장에서 재료를 챙겨 식당으로 향하다 663을 만난다. 도와준다는 그의 말에 무거운 장바구니를 그에게 맡기고 그와 함께 길을 걷는다. 백년도 더 된 이 시장은 관광객이 많은 핵심 거리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과는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채소와 과일, 소스 등을 팔며 정겨운 향기를 풍기는 이곳은 마치 기자를 홍콩에 사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밥을 해결하는 663, 가게의 재료를 사서 옮기는 페이의 모습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한편 페이는 그 열쇠를 가지고 663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의 집 물건을 하나씩 바꾸며 그곳에 그녀의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그에게 들키지 않으며 그의 집을 오가던 페이는 결국 그에게 걸리고 만다. 하지만 이미 페이에게 빠진 663은 그녀에게 죄를 묻는 대신 저녁 8시 캘리포니아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약속 당일, 그는 캘리포니아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그녀는 휴지에 그린 비행기 티켓을 남기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녀가 남긴 티켓에 적힌 당일이 되고, 그와 그녀는 재회했다. 샐러드 가게의 사장이 된 663과 스튜어디스 페이로.

영화는 또 다른 남녀, 경찰 하지무와 마약 밀매 중계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약 밀매를 계획하던 노란 머리의 여성은 동업자의 배신으로 마약밀매를 실패한다. 여자는 하루 종일 그들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고 그녀를 쫓는 조직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다.

 

▲청킹맨션
▲청킹맨션

노란 머리의 여성이 등장하는 이곳은 청킹맨션(Chungking Mansions)이다. 영화의 흐름은 기사의 흐름과 다르게 하지무의 이야기가 먼저 전개되기에, 영화의 시작이 바로 이 청킹맨션이다. 이곳은 홍콩에 있지만 인도의 공기가 가득한 곳이다. 인도의 분위기를 가진 이곳이 영화 도입부의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을 숨죽이게 만든다.

한편 하지무는 공중전화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여자 친구 ‘메이’가 만우절에 전한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친구에게 연락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무선호출기에는 메이의 부재중 기록 하나 없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이별을 알려주지만 그는 한 달 뒤인 5월 1일, 자신의 생일까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그는 오랜만에 지명수배범을 체포해 기분이 좋았고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메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자 들리는 건 남자 목소리였고 그는 끝내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장소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장소

지금은 편의점 세븐일레븐(7-ELEVEN)으로 변한 이곳은 하지무가 전화하던 장소이자 페이가 근무했던 장소로 경찰 663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 속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하지무의 이야기와 경찰 663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전 여자 친구 메이의 전화를 기다리던 하지무의 모습을, 시끄러운 음악 속 몸을 흔들며 일을 하던 페이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바뀌고 말았다.

“스스로 약속했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바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했다.”

하지무는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여자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난 상황이었다. 무작정 바(bar)로 향한 그는 마음속으로 바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노란 머리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는 결심대로 무작정 그녀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무시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쫓기다 이제서야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무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걸었고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옆자리를 지켰다. 어느새 잔뜩 취한 그녀를 702호실에 옮긴 하지무는 과거 어머니가 여자가 힐을 신고 자면 다음 날 발이 붓는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그녀의 구두를 벗겨 닦아주고 떠났다. 그렇게 생일을 맞이한 하지무는 몸의 모든 수분을 빼기 위해 조깅을 했다. 그것이 그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을 삐삐를 운동장에 두고 가던 그에게 삐삐 소리가 울렸다.

“702호실 친구의 메시지예요.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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