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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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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을 마주한 캠퍼스는 아직은 매서운 바람을 품고 있지만 새학기의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하다. 지난 2월 22일(목)에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선배들이 본교로부터 발걸음을 옮겼고 23일(금)에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러 후배들이 본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작과 설렘, 긴장과 걱정으로 가득 찬 3월에는 새로운 만남과 경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퇴근하여 양손에 치킨을 가득 사 들고 귀가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마음을 품게 만든다. 이처럼 3월이 주는 수많은 선물이 있지만 그중에 최고는 3월 첫날이 빨간날이라는 사실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당신의 2024년 3월 1일(금)은 어땠는가? 개강을 앞둔 마지막의 휴식 시간이었는지, 바쁜 일정 속 만나지 못한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었는지. 지금까지 수많은 3월 1일이 있었고, 그에 따라 수많은 하루가 있다. 그중 기자는 1919년의 3월 1일을 떠올리고 싶다. 1919년 3월 1일(토) 대한민국에는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한 독립 만세!”

1910년 8월 29일(월)은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는 뜻의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날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의 통치권까지 잃어버림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선조들의 삶은 어땠을까. 일제의 통치는 너무 가혹했다. 교사는 칼을 차고, 헌병이 경찰의 업무를 하며, 우리나라 국민 2명 이상 모이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독립을 바라기도 전에, 총과 칼로 통치하고자 하는 일제로부터 목숨을 부지하는 것부터 문제였다. 역사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기자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청년이었다면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느끼기보다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으며 불안 속에 살았을 것이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다. “세계의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회의에 참석한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Woodrow Wilson, 1856~1924)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해당하는 원칙이었다. 비록 일본제국은 승전국에 속했지만, 민족자결주의는 일제의 식민지로 고통받던 우리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갔다. 종교계 지도자와 국내·외 독립운동가, 학생들은 모여 3·1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3월 1일(토), 종교계 지도자들로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은 서울의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했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탑골 공원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 독립 만세” 지금은 아무런 감흥 없이 말할 수 있는 이 구호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1919년 4월 4일(금),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끌던 문용기 독립운동가가 오른팔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러자 그는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그는 끝내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렇게 땅에 떨어진 태극기는 다른 사람이 주워 들어 독립을 외치게 했다. 오산학교의 체육 교사로 근무한 조철호 독립운동가는 전교생을 지도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태극기를 들고 원장시장으로 행진하던 조진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누군가의 밀고로 일본 헌병이 매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걸어 나갔다. 칼을 든 일본 헌병을 마주하며 태극기를 손에 든 독립운동가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던 말이 있다. 바로 “대한 독립 만세”이다.

우리에게 3월 첫날이 공휴일인 것, 독립을 외치다 선조들이 숨을 거둔 것은 그저 역사이고 아무런 감흥이 없다. 만약 기자가 3·1운동의 현장에 있었다면 재빨리 몸을 숨겼을 것이다. 거리로 나가는 것, 태극기를 드는 것,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 무자비한 헌병의 총과 칼에 기자는 두려워 떨며 소리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들은 달랐다. 힘을 잃은 국가를 대신해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으려 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헌병을 손에 든 태극기와 목청으로 마주하는 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다는 걸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알았을 거다. 하지만 선조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징병 된 청년들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나아갔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험하다는 눈 덮인 파촉령 행군이 진행됐다. 잠이 들면 죽으니 돌아가며 깨우는 매 순간이 극심한 고통이었지만 그들은 나아갔다. 이에 이유를 묻자 그들은 “부끄러운 조상이 되기 싫다. 나의 후손에게 이런 고통을 남기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아무렇지 않게 대한민국을 살아갔다. 하지만 내가 내딛는 이 땅이 선조의 피와 눈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민을 그들의 죽음으로 지켜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너무나 익숙하고 아무 감흥 없던 구호를 다시 한번 마음을 담아 외쳐보자. “대한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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