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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해방되는 그날을 그리며, ‘나의 해방일지’(2022)

채워지고 싶은, 채워주고 싶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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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2022) 포스터/출처: 나의 해방일지 공식 홈페이지
▲『나의 해방일지』(2022) 포스터/출처: 나의 해방일지 공식 홈페이지

여기 출구를 찾아 나선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미정’. 미정은 자신이 단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적도,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사랑으로 가득 찬 적도 없다고. 이전에 만났던 남자는 그녀를 가득 채워 주긴커녕 그녀에게 돈을 빌리고 잠적한 상황. 그녀는 이 답답한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 ‘해방일지’를 쓰기 시작한다. 첫 장의 제목은 ‘좋기만 한 사람’. 기자는 그녀의 해방일지를 따라 길을 나섰다.

경기도 외곽, 산포시에 사는 미정의 출퇴근길은 고달프다. 아침 7시부터 집을 나서 노란 마을버스에 몸을 싣는다. 당미역 앞 정류장에서 내려 지하철을 탄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평소엔 지나쳤던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해방 교회의 간판이었다.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는 미정. 이내 시선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출근길에 오른다.

그러나 이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출근과 동시에 사내 행복지원센터로 호출돼 사내 동호회 가입을 압박받았고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왜인지 유독 그녀를 못살게 구는 상사에게 오늘도 꼬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빨간펜 자국이 어지러이 그어진 기획서를 수정하던 그녀는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남은 일을 마무리한다.

미정: 당신과 함께 여기 앉아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그지같은 일도 아름다운 일이 돼요. 견딜만한 일이 돼요. 연기하는 거예요. 사랑받는 여자인 척,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척. 당신 없이 있던 시간에 힘들었던 것보다 당신을 생각하면서 힘을 냈다는 게 더 기특하지 않나요?

이름도, 얼굴도 모를 ‘당신’을 생각하며 애써 힘을 내보는 미정. 그런 그녀에게 온 문자 한 통이 그녀를 다시 사지로 내몬다. 문자는 신용 대출이 연체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전 남자친구가 미정의 돈을 갚지 않은 것이다. 집으로 우편이 도착할 것이라는 은행원의 말에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들킬까 마음이 급해진 미정은 자신의 주소지를 아버지의 일을 돕는 이름 모를 술꾼 ‘구씨’의 집으로 옮긴다.

 

▲미정이 퇴근 후 내리는 버스 정류장
▲미정이 퇴근 후 내리는 버스 정류장

당미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이곳,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준다. 3월 초에 이곳에 방문한 기자는 아쉽게도 작품 속 녹음이 우거진 모습은 볼수 없었다. 삭막한 정류장과 도로를 보고 있자니 겨울날에도 홀로 이 길을 걸었을 미정이 문득 안쓰러워졌다.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 떨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도 이름 모를 당신을 떠올리며 걷지는 않았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날, 미정은 구씨를 찾아가 조심스레 부탁한다.

 

미정: 혹시 우편물 좀 받아줄 수 있나 해서요. 집에서 받으면 안 되는 게 있어서.

구씨: ...

 

구씨에게 우편물을 부탁하고 집을 나선 미정. 그녀는 자신을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하게 만든 전 남자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그러나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말 중에 사과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날 저녁, 구씨를 다시 찾은 미정. 미정은 평소처럼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며 술을 들이키는 그에게 어딘가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쏟아낸다.

 

미정: 왜 매일 술 마셔요?

구씨: 아니면 뭐 해?

미정: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그녀가 한바탕 쏟아내고 떠난 자리, 구씨는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핸드폰 화면에는 ‘추앙하다(推仰하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라는 어학사전 검색 결과가 띄워져 있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지만,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한다.

한편 미정은 또다시 동호회 문제로 사내 행복지원센터의 호출을 받는다. 그녀와 항상 함께 호출되었던 두 명과 나란히 앉아 기다리던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셋이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한다면 더이상 호출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의견. 이에 미정은 ‘해방클럽’을 제안한다. 해방클럽은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지 알아가고, 이에 대한 일지를 작성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미정은 해방되기 위해서 ‘좋기만 한 사람’을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하던 미정에게 구씨가 말을 걸어온다.

 

구씨: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되어 있는 거?

미정: 확실해.

구씨: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미정: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그렇게 서로를 채워주기 위한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미정과 구씨가 앉아 있던 약천사 대웅전 앞 계단
▲미정과 구씨가 앉아 있던 약천사 대웅전 앞 계단

 

미정: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세 살 때, 일곱 살 때, 열아홉 살 때. 어린 시절에 당신 옆에 가 앉아서 가만히 같이 있어주고 싶다.

 

그렇게 서로를 추앙하기 시작하고 함께 찾은 장소가 바로 이곳 약천사다. 미정과 구씨가 이곳을 찾은 계절은 여름. 그러나 이제 막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 약천사는 쨍한 여름보다도 미정과 구씨의 미지근한 온도의 관계를 더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자니 미정과 구씨가 바라보던 무지개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 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해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구씨: 넌 상황을 자꾸 크게 만들어. 불행은 잘게 잘게 부숴서 맞아야 되는데 자꾸 막아서 크게 만들어. 난 네가 막을 때마다 무서워. 더 커졌다. 얼마나 더 큰 게 올까?

미정: 들개한테 팔뚝 물어뜯길 각오하는 놈이 그 팔로 여자 안는 건 힘들어? …(중략) …나보고 꿔 간 돈도 못 받아내는 등신 취급하더니 지는...

 

그렇게 구씨는 미정을 떠났다. 행복이 무서워 도망친 것이다. 그러나 미정은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를 추앙하기로 했기에, 그를 ‘좋기만 한 사람’으로 기억하기 위해.

 

미정: 나를 떠난 모든 남자들이 불행하길 바랐어. 내가 하찮은 인간인 걸 확인한 인간들은 지구상에서 다 사라져버려야 되는 것처럼 죽어 없어지길 바랐어. 당신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길 바랄 거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길 바랄 거야.

 

그렇게 구씨가 미정의 곁을 떠난 사이, 그녀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동료와 상사의 불륜 사건에 휘말려 다니던 회사를 나오고, 갑작스레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그렇게 조금씩 지쳐가던 그녀는 어느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한 통 받는다.

 

구씨: 오랜만이다. 나 구씨. 어떻게 지내시나? 그동안 해방은 되셨나? 추앙해주는 남자는 만나셨나?

미정: 그럴리가.

구씨: 보자.

미정: 안되는데..살쪄서..살 빼야 되는데...

구씨: 한 시간 내로 살 빼고 나와.

 

미정은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구씨의 전화를 받았다. 축복하는 다수 속에 홀로 재 뿌리러 가보기로 마음먹고 참석한 자리였다. 신랑 신부 친구들을 부르는 사진사의 말에 살벌한 얼굴로 사진을 찍어주겠노라고 다짐하고 일어날 때, 구씨의 전화가 온 것이다.

 

미정: 이 사람 날 완전히 망가지게 두진 않는구나. 날 잡아주는구나.

 

▲미정과 구씨가 재회하는 다리
▲미정과 구씨가 재회하는 다리

이곳에서 기자는 한동안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수평선 너머에서 뱃머리부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배처럼 보였다. ‘구씨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미정의 모습이 이렇게 보였을까?’하고 생각하니 조금 들떴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다리 너머 보이는 한강, 꽃봉오리가 맺힌 나뭇가지 끝을 보니 봄이 되면 달라져 있을 것이라 단언하던 미정이 떠올라 먼 훗날 해방됐을 둘의 모습을 그리게 됐다.

 

미정: ... 이름이 뭐예요?

구씨: 구.자.경.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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