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달도 태양도 이웃이다. 奉天洞(봉천동)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다.’

누군가의 오랜 시간과 추억을 담은 『나는 봉천동에 산다』 (20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이야기를 궁금해 보거나 들어본 적 있는가? 누가 더 높이 치솟았나 경쟁하듯 서 있는 아파트,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매일 들르는 가게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가는 학교…. 모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고 그래왔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모두는 성장통을 겪으며 오랜 시간을 거쳐  완성된 것들이다. 조경란 작가는 태어날 때부터 봉천동에 살며 그곳에서 자랐으며 여전히 봉천동에 살고 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봉천동의 성장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고 그러한 과정을 1인칭 시점의 소설로 담아냈다. 기자는 봉천동의 성장 과정 이야기를 엿보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내가 사는 곳은 관악구 봉천동이다. (중략…) 사람들은 봉천동, 하면 우선 판자촌을 떠올린다. (중략…) 사람들은 나에게 어디 사느냐고 꼭 묻는다. …‥봉천동요. 아, 거기 신림동 있는 데요? 아뇨, 신림동은 바로 옆 동네예요. 아, 거기! 그래요,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예요. …‥아하, 그쪽 잘 알아요.

과거 봉천동은 가난과 설움이 담겨진 달동네이자 판자촌이었다. 서울대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 봉천동의 개발 추진 필요성이 인정되었고 지하철 개통, 도로 공사 등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봉천동은 저습 지대의 계단식 논으로 둘러싸여 있는 달동네에 불과하였다. 이런 이유 탓에 작가는 봉천동에 산다고 말하면 마치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과 가족의 궁핍을 날것 그대로 들켜버리는 것만 같아 머뭇거리기도 하였고, 때로는 수치로 느끼기 까지 한다. 이런 이유의 영향일까. 작가는 봉천동을 설명할 때면 ‘서울대입구역’ 근처라고 말한다. 그런 탓에 지하철 2호선에는 봉천역이 따로 존재하지만 기자는 자연스레 서울대입구역에 내리게 되었다. 기자 역시 누군가 기자의 사는 곳을 물을 때 근처 유명 지역을 대며 기자의 동네를 설명할 때가 있다. 작가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낯선 봉천동에게는 친숙함을 느꼈다. 봉천동 이른 아침의 찬 공기를 느끼며 작가의 발자취를 어렴풋이 따라가다 보니 곧바로 줄지어 서 있는 아파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촌은, 소설의 묘사와 같이 옛날 모습에서 완전히 탈바꿈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이촌 향도에 따른 인구 급증과 늘어나는 노동력을 흡수할 만한 산업시설의 부재, 무허가 불량주택 및 무분별한 주택정치, 급속화된 개발 등으로 80년대 중반부터 평화롭고 고요했던 작은 동네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자는 작가의 어린 시절이 담긴 달동네를 구경할 수 없었지만 넓게 펼쳐진 아파트들 사이로 뭔지 모를 씁쓸함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더욱 살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지만, 작가는 어떤 모습의 봉천동이든 그저 이 동네를 떠나고 싶어 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여기가 아버지의 고향이라면 내 고향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철거민?이재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 (중략…) 그러나 이러한 역사와는 상관없이 나는 지금껏 봉천동을 떠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작가가 봉천동을 완전히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아버지가 관악산에서 자살을 택했을 때이다. 봉천동이 한눈에 보이는 관악산. 아버지는 다람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즐겨 찼던 관악산에서 뛰어내렸다. 이유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힘들다는 추측뿐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상상하며 기자의 발걸음은 관악산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아침이었던 걸까. 관악산에는 유달리 한기가 느껴졌으며 등산객이 거의 없어 고요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설움과 작가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기자는 그렇게 한 시간 반을 올라갔지만 봉천동 일대가 훤히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없었다. 이렇게 높은 곳을 올라가는 동안 아버지 어깨의 무게는, 넓고 높은 관악산의 무게보다도 무겁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기자는 작가가 관악산을 더 이상 오르지 못하게 된 이유가 가슴에 와닿아 안타까웠다. 이후 작가의 생활을 한층 더 엿볼 수 있는 중앙시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작가의 집은 중앙시장을 가는 길이었으며 그 길 또한 작가의 일상이 담긴 곳이다. 기자는 중앙시장에 도착하면 작가의 삶을 밀접하게 바라볼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기자가 시장을 찾은 날은 일요일이었고 시장은 어두컴컴하게 기자를 맞이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중앙시장을 빠져나와 조금 더 이동하였더니 롯데백화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재래시장은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이러한 이유로 롯데백화점이 설립되며 중앙시장은 활기를 잃어버렸다. 불이 꺼진 작고 껌껌한 중앙시장과 환한 불로 많은 차들을 맞이하고 있는 커다란 롯데백화점은 확연하게 대립되어 보였다.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지만 가슴 속 깊이 허무함이 느껴졌다. 작가는 롯데백화점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중앙시장을 이용했고, 작가가 기자와 같은 마음으로 중앙시장에 가지 않았을 까 짐작한 채 하염없이 봉천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나는 그냥 봉천동에 눌러 살기로 했다. 어디 가서 물난리 같은 걸 만나게 된다면 나는 우선 봉천동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중략) 노란 달빛이 봉천동 이래로 한껏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 집은 봉천동에서 높은 지대에 있다. 게다가 내 방은 옥상 위 높고도 높은 옥탑방이다. 달도 태양도 이웃이다. 奉天洞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다.

작가는 봉천동을 떠나기로 다짐하면서도 매번 집으로 다시 돌아오곤 한다. 그녀에게 봉천동은 자신의 오랜 추억과 모든 세월을 함께한 곳이다. 또한 서울 달동네에서 보낸 그녀의 고단한 삶이 담겨진 봉천동의 옥탑방은 작가에게 문학과 글쓰기를 체험할 수 있게 한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봉천동을 떠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에 위치하고 있든 집은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나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공간으로 변화가 때로는 쓸쓸하고 안타까웠을 수 있다. 기자 역시 작가와 같이 태어났을 때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너무 오랜 시간을 한 동네에서 지내다보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공간이 익숙해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때문에 익숙함에서 벗어나 작가와 같이 동네를 떠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봉천동에서 작가를 마주한 뒤, 기자 역시 생각이 바뀌었다. 기자에게도 ‘동네’는 익숙해져 지겨운 공간이 아닌 기자의 시간을 기억해주는 소중한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