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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자연을 대하는 자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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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트 채플-자연과 대화하는 건물

스위스 작은 마을에 경사진 산기슭에 피터 줌터(Peter Zumthor)라는 건축가가 디자인한 ‘성 베네딕트 채플’이 있다. 이 교회는 경사대지위에 나무로 마루를 만들어서 평평한 타원형에 가까운 평면을 가지고 있다. 줌터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교회 역시 건축 재료와 구법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훌륭한 작품이다. 규모면에서는 아주 작지만 이 작은 교회는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은 주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공물인 건축도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세 가지이다. 이를 경사대지 위에 건축물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첫째,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 재개발에 사용되는 방식이다. 대지의 경사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거대한 축대를 쌓아서 평평한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아파트 건물을 앉힌다. 대형 토목공사가 필요하고 자연의 모습을 모두 바꾸어 버리는 폭력적인 방식이다. 두 번째는 자연을 이용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방식은 첫 번째 방식보다 좀 더 스마트하다. 경사대지가 있다면 그 경사면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서 경사대지에 교회를 짓는다면 대지의 경사면을 이용해서 교인의 객석을 배치하고 강대상을 아래쪽에 두어서 편하게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능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재미난 건축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자연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보는 방식이다. ‘성 베네딕트 채플’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 교회는 경사대지에 마루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벽체와 마루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땅과 교회마루 사이의 비어있는 공간을 통해서 음향의 공명을 만들어내고 인공의 건축물과 자연이 대화를 할 수 있는 디자인을 했다. 이렇게 한 이유를 건축가는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교회”를 디자인 하려했다고 설명한다. ‘성 베네딕트 채플’은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보는 건축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정자가 이러한 종류의 자연과 대화를 가능케 하는 건축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자는 물의 가운데 위치해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있다. 자연과 건축 사이의 물로 확보된 빈 공간에서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건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디자인은 자연을 극복할 대상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이용할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보는 동등한 관계 설정이 있고서야 나올 수 있는 디자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디자인에서도 자연환경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보는 것이 가장 성숙한 디자인의 방식이다. 

 

달동네의 탄생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지리시간에 배웠다시피 국토의 70%가량이 산지로 되어있다. 이 말은 대부분의 땅이 경사대지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서울을 처음 도읍으로 정했을 때 가장 많이 본 것이 풍수지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배산임수”이다. 서울은 이처럼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도시 계획적 측면에서 사람들은 평지에 살고 산에서 땔감을 구해오고 앞에 있는 강에서 생활용수를 해결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배산임수의 컨디션이 인구 10만 명 정도의 도시에서는 큰 문제없이 작동을 하지만 인구 1000만 명이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를 상상해보자. 평지 1000만 명이 모두 살수는 없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고층건물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산에서도 사람이 살아야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나타났다. 급격하게 피난민이 몰린 서울과 부산지역에 “달동네”가 생성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70~80년대의 산업화를 통해서 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이전을 하였다. 당시로서는 고층건물을 지을 기술력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서울의 영역은 계란 프라이처럼 펴져나가게 되었고 기존에는 주거로 사용되지 않고 땔감을 구하는 뒷산이 사람이 사는 주거지가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겨울철 난방이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는 것과 시점을 같이 한다. 겨울철 땔감이 나무에서 연탄이 되고 나무가 있던 자리에 무허가 주거들이 들어섰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겨울철 마다 나오는 단골 영상은 겨울을 준비하면서 언덕길에서 리어카 가득히 연탄을 실은 아저씨와 길게 줄을 서서 연탄배달을 돕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이렇게 자연 구릉지에 형성이 된 동네는 지금도 금호동, 신림동, 사당동 등지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에는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만들기 전이었다. 마이카 시대가 70년대 후반에 시작이 되었으니 그 전에는 주차걱정이라는 것은 없었던 좋은 시절이다. 그래서 주거 단지가 형성이 될 때에도 사람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다. 집집마다 냉장고도 크기 않았던 시절이어서 동네 어귀마다 시장이나 식료품 가게가 있었고, 동네시장에서 그날 저녁 찬거리 정도의 적은 양의 장을 봤기 때문에 장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걷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요즘 같이 일 이주에 한 번씩 장을 보는 많은 양의 짐들을 자동차 없이 달동네에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달동네가 만들어지던 당시의 삶의 모습을 담아내기에는 달동네의 공간구조는 무리가 없었다. 달동네는 사람이 움직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사람에게는 정감이 가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옹벽의 탄생

70년대부터 시작된 아파트의 공급은 주로 여의도와 강남의 한강주변 평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에는 땅이 평지였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초기의 평지 중심의 아파트가 다 지어진 후에도 더 아파트가 필요해지자 달동네를 없애고 경사지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이 된다. 앞서 생성된 달동네는 비록 상하수도 전기설비는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지만 공간구조는 사람을 위주로 되어있었다. 집의 크기가 작고 심지어는 방하나의 규모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휴먼 스케일이었다. 그러나 아파트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의 건물에 최소 100세대가 들어가는 대형 건축물이다. 길이도 수십 미터가 된다. 이렇듯 수십 미터의 건물이 평지에 들어갈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경사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커다란 평지의 땅이 필요해졌다. 당연히 토목기사들은 커다란 계단식 택지개발을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땅에 어마어마한 콘크리트 옹벽을 보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에 건물을 단위가 작은 규모였다면 굳이 그렇게 몇 층 높이의 옹벽을 만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아파트를 디자인 하는 사람들은 편하게 디자인하기 위해서 건물을 땅에 맞추기 보다는 건물에 땅을 맞춘다. 경사가 급한 땅일수록 그 옹벽의 높이는 더 높아진다. 달동네가 재개발 되어서 들어가는 지역일수록 더욱 심하다.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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