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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적게 보고 가족 간 대화를 많이 하는 집 만들기(1)
  • 유현준 (건축학부 교수)
  • 승인 2018.03.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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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TV를 많이 보는 이유

얼마 전 친구가 마당이 있는 아주 작은 집인데 무척 크게 느껴졌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렇다. 30평짜리 주택이 100평짜리 주상복합보다도 더 넓게 느껴지기도 한다. 보통 100평짜리 주상복합은 주차장 같은 공용면적을 제외하더라도 작은 주택보다는 실내면적이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당 있는 주택이 넓은 평수의 아파트보다 더 넓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마당은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이다. 주상복합에서 아무리 넓은 거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거실의 인테리어가 매일 매일 시시각각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당은 때로는 비도 오고, 햇살도 비치고, 눈이 내리기도 하고, 낙엽이 떨어지기도 한다. 아침의 동편 햇살을 받은 마당과 저녁노을 때의 마당은 다르고, 밤이 되어 어두운 달빛을 담은 마당은 완전히 다르다. 그 밖에도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이벤트는 다양하다. 고추를 말리기도 하고, 바비큐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벤트와 날씨가 마당의 얼굴을 항상 바꿔준다. 마치 매일 매일 벽지와 가구가 바뀌는 거실이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고정되어있고 매일 TV 보는 행위 외에는 별다른 일이 안 일어나는 거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색상의 공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 다르게 저장된다. 우리는 기억 속에 변화가 없는 집에 살기 때문에 더 TV를 바라보는 것이다. 적어도 TV속에는 드라마를 통해서 이벤트가 일어나고, 장면이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화면의 TV를 사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마당크기만한 TV가 나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혹자는 아파트에는 마당은 없지만 발코니가 있지 않느냐? 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발코니와 마당은 다르다. 아파트의 발코니와는 다르게 마당은 정방형에 가깝다. 폭이 2미터도 안 되는 발코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행동은 제한적이다. 그저 화분을 놓고, 빨래를 널거나, 바깥 경치를 바라보는 식의 한 방향성을 가지는 행위들이다. 어느 공간이 한쪽으로 좁고 한쪽으로 길면 사람의 행위는 그것에 맞게 조정이 된다. 그래서 건축이 무서운 통제방식이 되는 것이다. 좁고 긴 발코니에서는 바깥을 바라보는 일밖에는 못하지만, 반면에 정방형의 마당에서는 둥그렇게 마주보고 앉을 수 있다. 사람간의 관계성이 쌍방향을 띠게 되면서 더욱 다채로워진다. 한마디로 어느 한 반이 방과 후에 공원에 가서 수건돌리기하는 학급이 있고 다른 한 반은 단체로 영화 관람을 하는 학급이 있다고 치자. 두 학급 중에서 어느 반이 더욱 친구간의 우정이 돈독해질까? 당연히 수건돌리기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정방형의 마당이 담을 수 있고 만들어낼 수 있는 관계성은 크다. 공간은 실질적인 물리량이라기보다는 결국 기억이다. 우리가 몇 년을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어떠한 추억을 만들어내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하게 기억되는 공간은 다른 공간으로 우리의 머릿속에서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인식이 된다. 

  마당과 이벤트의 기억 뿐 아니라 주택은 천정의 높이와 모양이 다양하다.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고 경사가 지기도 한다. 물리적 공간의 체험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보통 아파트나 주상복합은 천정고가 2.5미터를 넘기 힘들다. 아파트는 보통 2.25 미터, 주상복합은 2.4미터이다. 천정고가 조금만 높아져도 25층 이상의 건물이 되면 한 층이 더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천정고는 최소한으로 만들어왔다. 아파트의 경우처럼 어느 방에 가든지 똑같은 천정고를 가지는 공간경험은 단조롭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 주택의 경우는 천정고가 다채로운데다가 마당으로 나가면 천정고가 무한대인 공간이다. 이렇듯 다양한 공간체험, 이벤트, 날씨 등이 반영된 공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다른 책처럼 저장이 된다. 이런 기억이 모이면서 10평짜리 마당은 100평이 넘는 기억의 서랍에 저장되기 때문에 더 넓은 집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가족애를 위한 아파트 평면 만들기

거실이라는 용어가 우리나라 건축역사에 처음 들어온 것은 해방이후이다. 그 이전 한옥에 살 때에는 우리나라에 거실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단지 우리나라 한옥에는 대청마루가 있었을 뿐이다. 한옥은 중정형식의 마당을 중심으로 해서 사랑채와 안채가 있고, 안채를 구성하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보편적인 구성이다. 밥은 보통 부엌에서 상을 차려서 안방으로 가지고 와 앉아서 먹었다. 식탁이라는 것이 따로 없고 이부자리를 펴면 침실이 되고 상을 들이면 식탁이 되는 변형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형식에서 수백 년을 살던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지었을 때에도 전체적인 틀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보편적인 평면도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이 있고, 더 들어가면 부엌과 식탁을 놓는 자리가 나오고, 그 앞에 거실이 위치한다. 그리고 더 들어가면 방이 2개 나온다. 이러한 전형적인 쓰리베이 아파트의 구성은 어찌 보면 한옥에서 마당이 거실이 되고, 대청마루 부분이 식탁을 놓는 자리가 된 것과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 각종 농사일의 작업장이 되었던 마당에 지붕을 씌우고 거실로 만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평면적으로 보면 아파트 구성과 한옥은 지극히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관계의 눈으로 이 공간을 살펴보면 크게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한옥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가 있고 옆으로 비켜서 마당으로 들어간 후 대청마루로 올라가서 한번 방향전환을 하고 안방이나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안방이나 건넌방에 들어가서 앉아서 창문을 바깥으로 열어젖히면 마당을 볼 수 있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툇마루로 나가게 되면 외부공간인 마당을 툇마루에 앉아서 즐길 수가 있다. 이 툇마루 공간은 우리나라 건축에서 아주 중요한 중간적인 성격을 띠는 공간이다. 그 이유는 처마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처마아래에 있다는 것은 비가 올 때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신발을 신지 않고서 바깥바람을 쐬러 나갈 수 있는 공간이다. 고로 외부와 내부의 중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들어오는 사람의 공간적인 시퀀스를 보면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방안에서 창문을 열면 다시 외부공간인 마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네트워크”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의 경우는 다르다. 아파트에 들어온 사람은 복도를 거쳐서 거실을 지나게 되고,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가게 되면 창문은 모두 바깥 창문을 바라보게 된다. 만약에 거실이 마당에 지붕만 씌워진 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최초의 건축가는 안방에서 거실을 향해서 창문을 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보다도 심리적으로 더 넓게 느껴지는 아파트 평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창문을 거실이 아닌 바깥으로만 내었기 때문에 아파트에서는 일단 방에 들어가면 거실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관계의 다이어그램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공간구성은 나뭇가지 같다고 해서 “수목적”관계라고 말을 한다. 수목적 관계에서는 방끼리 연결이 되지 않고 분리되어있는 공간구성이다. 집에서 아이들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방문을 닫으면 그대로 나머지 식구들과는 단절이 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수목적 관계의 공간구성은 서구적인 사생활을 만드는 데는 효율적이다. 하지만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기에는 좋지 않은 공간구성이다. 만약에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모든 방이 거실 쪽으로 창문이 나있다고 생각을 해보라. 그렇게 되면 얼마나 풍요로운 공간체험이 될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혹자는 그냥 문을 열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창문과 문은 엄연히 다른 건축요소이다. 문은 바라보면서 동시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 문은 프라이버시를 “0”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하지만 창문은 서로 바라볼 수는 있으되 건너갈 수는 없게 해주는 건축요소이다. 창문으로 연결된 공간은 적절한 사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느슨하게 관계를 형성해주는 장치이다. 부모는 안방에서 책을 읽고 있고 창문을 통해서 거실너머로 또 다른 창문으로 자녀가 공부하는 모습이 있는 아파트가 필자가 보고 싶은 우리나라 아파트의 풍경이다. 그런 모습의 집에서는 가족끼리의 대화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

 

유현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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