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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그 잊힌 기억을 찾아서

해 뜨는 산에 빛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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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구름 사이로 고개를 스윽 내밀며, 언제 추웠냐는 듯 햇볕을 내리쬔다. 거리에는 봄노래가 들리기 시작하고, 학교에는 봄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간만에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선 기자는 앞으로 기자가 마주 서야 할 공간이 그리 봄처럼 따뜻하지는 않아 마음 한쪽이 먹먹해졌다. 지난, 3월 4일(일). ‘SBS 일요 특선 다큐멘터리’에서는 <잃어버린 남산의 기억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야경이 아름답고 데이트 코스로 우리에게 친근한 남산. 하지만 남산은 가슴 아픈 우리의 과거를 품고 있었고 기자는 그 현실을 향해 나아갔다.

남산에서 마주한 첫 번째 역사는 과거 독재 시절 남산이 그 중심지의 기능이었다는 것. 명동역 1번 출구로 나와 대한적십자사 건물 쪽으로 이동한 기자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공사 현장이었다. 남산 예장동 4-1번지 일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속으로 설치된 국가정보·수사기관인 중앙정보부 6국의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서울시의 주도로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에서는 과거 입에 담을 수 없던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잡혀 고문을 받았던 곳. 고문에서 풀려나온 사람들도 차마 다시 오지 못했다는 그곳은 지금 그때를 기억하고 인권을 기리는 광장으로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사 중인 현장을 돌면서 올라가다 보니 ‘문학의 집’이 보였다. 남산 예장동 2번지에 있는 문학의 집의 거리는 단순히 지나치면 그저 예쁜 거리로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그 건물의 끝을 마주하다 보면, 과거 중앙정보부장의 공관(公館)이라는 글씨가 눈앞에 나타난다. 지어진지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건물의 외형은 이전과 같지만, 그 안에는 이미 커피 볶는 향과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카페로 개조된 작은 공간에서 스무디를 마시며 집을 둘러보던 기자는 이내 스무디의 단맛보다는 이전 집주인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쓴맛에 사로잡혔다. 과거 이 일대에는 민가가 없었고 경호원들만이 주변에 함께 거처했다고 한다. 독재 권력의 핵심이자 철저히 그 존재가 둘러싸여 있던 곳. 그곳에서 먹는 스무디는 왜 이렇게 썼을까. 이내 문학의 집에서 나와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서울 유스호스텔이 환영한다는 문구를 걸고 있었다. ‘환영한다’라는 단어의 이질감 속에서 마주한 서울 유스호스텔은 과거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이다. 독재정권의 중심지이자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고 간 근본적인 공간이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바뀌어, 많은 관광객의 숙박을 책임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는 이곳에서 박정희 정권 의문사 1호로 세상을 등진 故 최준길 교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당시 간첩임을 자백하고 자살을 했다는 발표가 났지만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간첩 자백 후 자살이 아닌, 고문치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의 억울함이 그 건물에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비단 남산은 독재의 중심지만이 아니었다. 독재 이전, 일본은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남산을 근거지 삼았다. 그리고 남산은 조선 식민지배 강화의 중심지로 변화해나갔다. 유스호스텔에서 언덕을 가로질러 내려가다 보면 조그맣게 꾸며진 장소가 나타난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기억의 터’, 기억의 터는 일본군 문제가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었음에도 서울 시내에 이를 기리는 공간이 없다는 지적에 조성된 공간이다. 터의 한 가운데에는 ‘대지의 눈’이 눈길을 끌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성함과 증언이 시기별로 새겨져 있고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이 그려진 대지의 눈을 보고 있으면 더 가슴이 아파진다, 그리고 그곳의 바로 옆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글귀가 한국어, 영어, 일본어와 중국어로 세겨진 ‘세상의 배꼽’이 설치돼 있다. ‘기억의 터’ 내부에는 ‘통감관저터’가 자리 잡고 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이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한 곳. 텅 빈 공터 앞의 작은 표지석만이 이곳이 경술국치 시작점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 외에도 ‘기억의 터’ 내에는 조선 왕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을 이끈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파편을 거꾸로 세운 ‘거꾸로 세운 동상’ 또한 설치되어 우리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지나온 길을 돌아가 숭의여자대학교로 방향을 돌리다 보면 서울애니메이션 센터가 나온다. 명동 근처에 있는 애니메이션 센터여서인지 비교적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외국인이 무리 지어 만화 캐릭터 ‘라바’의 웃음을 구경하고 있었다. 활짝 웃는 만화 캐릭터의 웃음.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웃는 라바의 옆에 있는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 터’ 표지석이었다. 을사늑약 이후에 설치되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탈취한 핵심공간이자 경술국치 후 명칭을 바꿔 침탈을 본격화한 조선총독부가 있던 곳. 1926년 경복궁 안으로 총독부를 옮기기 전까지 이곳은 일본인들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그 현장은 어디에도 없고 지금은 ‘라바’만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라바의 웃음을 뒤로하고 숭의여자대학교와 리라초등학교의 사이에 있는 길을 올라가다 보면, 리라고등학교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고등학교 운동장의 끝에 ‘남산원’이 있었다. 보육시설로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과거 일본 군국주의자 노기 마레스케를 수호신으로 삼은 ‘노기 신사(神社)’가 있던 곳이다. 약 90여 년 전 많은 사람이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이곳에서 신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일부 벽에 남은 글자 몇 자와 남산원 입구에서 사람들의 손과 발을 씻어주었던 돌수조만이 과거 이곳이 노기신사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허전하고도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기자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한양공원터’. 남산에 있던 한양공원은 1908년 남산 기슭을 임대받은 일본인들이 세운 공원으로 이 부지에 13만 평 규모의 조선 신궁이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학생들의 수학여행, 소풍, 방학 숙제 등에 신사참배 일정을 넣었고 어린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유도했다. 그렇게 남산 일대는 지금의 데이트 코스나 가벼운 조깅 코스가 아닌 신사참배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해방 후 신사가 사라졌지만, 그곳이 이전 신사참배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는 한양공원터 표지석을 보여주며 그 아픔을 시청자들에게 전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느꼈던 그 느낌을 느끼기란 어려웠다. 한양공원터에 대한 정확한 위치 정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자는 휴대전화를 킨 뒤, 한양공원터 표지석을 찾아 이곳저곳 이동했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켜보았지만, 기자의 위치와 일치하는 곳에서는 끝없는 계단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남산을 세 번 오르내리고도 기자는 한양공원터 표지석을 찾지 못한 채 남산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속고 있었어요’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를 한 학생이 관련 유적들을 둘러본 뒤 한 말이다. 우린 교과서를 통해, 뉴스를 통해, SNS를 통해 일제강점기와 독재 등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다. 하지만 그 텍스트 속의 모습이 현재 어떠한지 알려주는 정보는 극히 드물다. 기자가 하루 동안 걸어 다닌 그곳들에 과거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면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쳤을 현재의 모습은 ‘과거를 잊지 말자’가 그저 먼 꿈이란 듯 기자를 비웃고 있었다. 비단 남산뿐만이 아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렇게 우리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힐 우리의 역사는 아직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단순 잊지 않기를 넘어 기억하는 노력이 필요한 상황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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