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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조, Nucleus-78-99,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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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조, <Nucleus-78-99>, 1978년, 145.0×112.0cm, 캔버스에 유채, 소장번호 1852
이승조, <Nucleus-78-99>, 1978년, 145.0×112.0cm, 캔버스에 유채, 소장번호 1852

이승조가 1960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던 해에는 4.19혁명이, 다음 해에는 5.16군사정변이 연이어 일어남으로써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앵포르멜이 지배적이던 미술계 역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어 앵포르멜에서 벗어나 전위적 미술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승조는 1962년 동급생 8명과 함께 오리진 그룹을 창립하였다. 이후에는 한국아방가르드협회(이하 AG 약칭)의 창립 멤버로도 참여하여 전위적인 성향을 이어갔고, 동시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수회에 걸쳐 입상하면서 그의 기하학적 추상회화가 주목받았다. 패턴의 반복과 교차, 화면 분할, 원색의 사용 등 그의 추상회화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으며, 반복적 이미지는 디자인적 요소를 보여준다.

  20대 초반의 젊은 미술가들로 구성된 오리진 그룹은 1963년 창립전에서 “일체의 인간사적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이 물려받은 유전자의 순수성과 삶을 구축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고 심화된 평범을 구현한다.”는 이념을 내걸었다. 이렇듯 이들은 기성 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위적인 미술을 추구하고자 했다. 1967년 오리진, 무동인, 신전동인의 세 그룹이 함께 참여한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은 “행동하는 화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여기서 무동인, 신전동인과는 달리 오리진은 회화작품만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캔버스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앵포르멜이라는 기성사조에서 벗어나 기하학적 추상회화라는 그들만의 새로운 평면적 세계를 선보였다. 이승조 역시 이 전시에서 <핵> 연작을 처음 선보이면서 그만의 특징적인 추상회화를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는 AG, 에꼴 드 서울,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등의 전시에 참여하며 단색화의 특성을 받아들여, 이 시기 그의 <핵> 연작에서는 무채색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검은색의 사용이 늘어나서 파이프 형태와 바탕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이전의 <핵> 연작에서 선명한 파이프의 형태와 화면분할로 현란한 시각적 효과와 평면성을 부각시켰다면, 본관 소장품에서는 단색화의 흐름 속에서 어둠 속에 사선으로 기울어진 파이프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눈을 사로잡는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검은색 바탕 위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파이프 형태의 입체감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핵> 연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파이프의 형태로 인해 이승조를 “파이프 통의 화가”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정작 작가 자신은 “구체적인 대상의 모티프를 전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본관 소장품에서는 파이프라는 현실의 대상과 캔버스 위의 원통형태의 경계가 모호해 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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