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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2011)

낭만의 도시 파리 벨 에포크로의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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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중순,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막바지에 다다르며 기승을 부리던 즈음 파리에 도착했다. 거리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끈적임 없는 공기에 이정도면 더위로부터 잠시 피신을 온 거라 생각해도 무방할 듯했다. 파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도 한참 지나 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샹젤리제 거리는 여전히 낮처럼 밝고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착하면 로맨틱한 야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파리의 첫 인상은 이곳을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시끌벅적한 장터 같았다. 과연 전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대표적인 도시라는 명성이 체감되는 듯 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도 다 제각각의 이유가 있겠지만, 기자는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를 보고 파리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며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21세기에 사는 평범한 작가 지망생 길이 자정이 되면 파리의 황금시대로 시간 여행을 경험하는 내용으로 매우 마법 같은 이야기다. 아름다운 재즈 풍의 배경음악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 하나하나에 파리의 낭만이 가득 담겨 있어 파리를 떠올리면 이 영화가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한다.

"여기 살고 싶어요. 바게트 빵을 옆에 끼고 센강변을 걸으면서   

카페 드 플로리로 가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돼요."

주인공 길은 미 동부 출신의 성공한 헐리우드 작가지만 상업적 이윤을 위해 쓰는 영화 대본보다 자신만의 소설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모태 파리지앵’ 이라 칭할 정도로 그 누구보다 파리의 예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그는 약혼녀와 함께 파리 여행을 오게 되면서 이 도시에 흠뻑 취하게 된다. 길이 걸었던 센강변 앞에 서서 어둑어둑해지는 강가를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걷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강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빵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유람선이 지나가면 반대편에서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너무 여유롭고 행복해보여서 한없이 부러워졌다. 그러다 문득 그 생김새를 살펴보니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곳에 여행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길고 힘들었던 일상의 그늘에서 벗어나 여름날의 바캉스를 제대로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길: 같이 파리의 밤거리를 걷지 않을래?

이네즈: 싫어, 우린 춤추러 갈거야

길: 분위기 깨긴 싫지만 그럼 난 바람 좀 쐬어야겠어.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것보다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 더 좋은 길은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그러나 여행객인 길에게 파리의 거리는 모두 비슷한 곳, 결국 길을 잃고 헤매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와 함께 나타난 차에 얼떨결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가 꿈꾸던 황금시대,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이동을 하며 피카소,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 당대를 풍미한 그가 동경하던 예술가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아직도 파리의 곳곳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해 19세기의 마차나 투어 전용 구형 푸조가 운행되고 있다. 특히 개선문과 콩코드 거리 사이에서는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지나가는 마차나 푸조를 발견할 때면 어김없이 길이 떠올랐다. 그리고 순간 기자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시간여행을 떠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다. 만약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르네상스 시대가 좋을 것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까지도 했었으나 아직 자정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단념했다. 

 

세기가 바뀔 때 만들어졌어요. 아름답지 않아요? 전 그때가 가장 좋아요. 

모든 게 완벽하던 때, 과거는 제게 늘 마력 같아요. 

우리가 사는 현재는 혼란스럽죠 모든 게 너무 빨리 움직이고 변해요.

 

파리의 건축물들은 아주 오래전에 설계되어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건물처럼 보여도 새롭게 칠하고 가꾸어 벌써 몇 세기가 넘은 역사를 지닌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파리의 시간은 중세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어느새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아 거리를 비추는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파리는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동행인의 말에 서둘러 바토무슈를 타러 선착장으로 향했다. 길은 헤밍웨이의 소개로 스타인에게 자신의 소설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동경해 오던 위인들에게 작품을 평가받고 행복에 겨워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그들 앞에선 한없이 초라한 것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의 앞에 피카소의 뮤즈이자 헤밍웨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인 아드리아나가 등장한다. 그녀는 길의 소설을 칭찬하며 자기 역시 과거를 사랑하고, 자신이 그 시절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원망한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길은 그동안 약혼녀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매혹적인 그녀에게 빠져들어 매일 밤 그녀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르면 지금이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아드리아나와 함께 한 번 더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 길은 그녀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라 믿었던 1890년대의 파리, ‘벨 에포크’로 돌아간다. 길이 그러했듯 1920년대에 살아가고 있는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황금시대, 1890년대의 막심레스토랑에 도착하자 그 누구보다 행복해한다. 그러나 벨 에포크에서 만난 고갱과 드가, 앙리는 현 시대의 창의력에 대해 불평하며 르네상스 시대가 진정한 황금기였다고 한탄한다. 여기서 길은 누군가에게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대도 사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길은 벨 에포크 시대에 머무르려 하는 아드리아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정각이 되면 에펠탑에서 펼쳐질 불빛 쇼를 보기위해 시간에 맞춰 바토무슈 유람선에 올랐다. 배는 선착장을 떠나 센강을 따라 유유히 흘러갔다. 배 위에 올라선 사람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아름다운 파리의 야경을 담기 바빴다. 온통 까만색으로 물든 강가에 붉은 주황색 불빛이 은은하게 비쳐 그림자를 이뤘다.

 

과거는 죽은 게 아냐, 사실 지나가지도 않았어

 

많은 이들이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기대하며 살아가곤 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난 왜 이런 시대에 태어나서’ 라는 원망을 하며 꿈을 포기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결코 정당한 이유가 아니라 패배자의 도피일 뿐이라고 전한다. 스타인이 길의 작품을 읽고서 “예술가의 책임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존재의 공허함을 채워 줄 해답을 주는거에요. 패배주의자처럼 굴지 말아요.” 라고 말하는 대사에서 구차한 변명을 생각지 말고 포부와 자신감을 가지라는 영화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파리는 언제나 이방인들에게 낭만의 도시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그곳이 삶이었던 이들에겐 마찬가지로 그저 반복되는 현실일 뿐이다. 어느 시간, 공간에도 절대적인 황금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 감독은 1920년대 파리를 향유했던 모든 문인과 예술가들을 동원해 길과 관객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시간은 ‘현재’이며, 우리의 삶을 불안하고 복잡하게 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로의 도망이 아닌 현재에서의 최선, 그리고 진심을 다해야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정각이 되자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기자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펠탑이 시간에 맞춰 반짝거리며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순간 태어나서 처음 보는 황홀한 풍경에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불빛들이 까만 밤하늘을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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