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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을을 찾아 떠나다, 『메밀꽃 필 무렵』(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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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니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부딪혔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햇살은 바람이 머물다 간 기자의 이마를 따뜻하게 해주기 적당했다. 하늘은 너무 맑아 졸린 눈을 트이게 해주었다. 햇살이 기자의 눈을 찌푸리게 할 때 즈음, 다시 앞을 보고 길을 걸었다. 가을. 사람들은 이러한 날씨를 흔히 그렇게 부른다. 기자 또한 그들의 선택을 조용히 따라한다. 가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효석 작가의 『메밀꽃 필 무렵』은 가을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메밀꽃, 달밤, 인간을 통해 가을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특히,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달밤에 메밀 밭 곁을 나란히 걷는 장면은 우리나라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사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그린 가을은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가을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가을에 대해 문외한인 기자는 그 아름다움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가을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이효석 작가에게 한 수 배우고자 강원도 봉평으로 떠났다.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봉평장에 도착했다. 봉평장은 꽤 북적이며 여러 소리와 냄새가 공존하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의 소리, 꽈배기 튀기는 소리, 구워진 가을 전어 냄새 그리고 메밀꽃 밭의 향기까지. 시장의 모든 것들이 합쳐져 시장 특유의 소리와 냄새가 형성되었다. 특히 메밀전병을 굽는 소리가 기자의 식욕을 자극했다. 가까이 가보니 메밀전병뿐 아니라 메밀부침개와 메밀국수, 메밀막걸리를 시장 바닥 여기저기 설치된 천막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그 냄새들은 아침도 거른채 도착한 기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마치 장에서 만난 암탕나귀에게 자극 받은 허생원의 당나귀처럼 말이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붓하게 사 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허생원과 조선달은 일명 장돌뱅이로, 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파는 떠돌이 생활을 한다. 기자가 접한 봉평장과 달리, 그들의 봉평장은 꽤나 쓸쓸했나 보다. 활기를 찾고 싶었는지 그들은 봉평장을 떠나 대화장으로 향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봉평장에서부터다. 그들의 달밤 여정 출발지도, 허생원이 동이를 만난 것도 말이다. 장터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좋은 곳이다. 가을을 궁금해 하는 기자를 놀리듯 날씨는 어느새 꽤 더워졌다. 그렇다고 한여름의 날씨는 아니었다. 그저 가을로 착각하여 가을 옷을 꺼내 입은 사람들을 놀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날씨의 얄궂은 장난에도 기자는 굴복하지 않았다. 햇볕이 잘 들고 시장의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아 메밀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메밀전병, 메밀부침개를 먹으며 보란 듯이 9월 초의 날씨와 봉평 장터의 정취를 즐겨 보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 토속적인 냄새, 햇살과 그림자의 적당한 간격. 무언가를 시작하기 딱 좋은 곳이다. 특히, 사람의 연(緣)이 시작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허생원과 동이도 그랬을까? 그들의 관계는 봉평장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두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 생원은 조금도 동색 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그들의 인연은 따귀를 때리면서 시작됐다. 충줏집이라 불리는 여성을 두고 두 남자의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충돌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9월 초의 날씨와 봉평 장터의 정취에 취했는지, 혹은 만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인연임을 은연 중에 알아챘는지 그들은 자연스럽게 화해를 하며 대화장까지의 여정을 함께 한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푸른 하늘이 막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할 때 즈음 기자는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밭에 도착했다. 덥지도 차지도 않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기자의 이마에 살짝 부딪혔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반쯤 들려 저편의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메밀꽃이 정말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바람은 아름다운 것에게만 특혜를 주지는 않았다. 바람은 저편에 있는 메밀꽃도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그래서였는지, 왠지 모르게 바람이 달콤했었다. 달빛, 하얀 메밀꽃, 좁은 길, 밤 기운. 허생원은 이런 아름다운 배경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 아름다움인 사랑을 그 배경에서 뺄 수가 없던 것이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기 때문이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허생원과 동이의 연이 특별하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달밤, 메밀꽃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연까지 담아낸 작품인 것이다. 기자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장면만을 묘사해서가 아닌, 어쩌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緣)을 통해 가슴을 아련하게 자극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 아닐까.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길을 걷다 보니 하얀 메밀꽃들도 하늘의 색이 부러웠는지 어느새 그 색감을 따라 하고 있었다. 하늘은 보란 듯이 더 깊은 주황색을 띠었다. 기자가 떠나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졌다. 하늘의 어두워짐을 보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얀 메밀꽃과 검은 하늘의 어우러짐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아쉬운 대로 산허리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과 해 질 녘 하늘의 어우러짐을 보며 집으로 향했다.

기자는 당일로 가는 여행의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횡성휴게소에 정차했다.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꽤나 차가운 바람이 이마에 부딪혔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렸다. 하늘은 짓궂게도 어두컴컴해져 있었고 달빛이 어두운 하늘을 유일하게 빛내고 있었다. 계속 고개를 들고 있으니 목이 아파 다시 앞을 보고 길을 걸었다. 가을. 기자는 오늘의 날씨를 가을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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