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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하동과 서귀포 속 기억의 공간을 따라가다

첫 사랑의 아련함을 추억에 담은 <건축학개론>(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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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첫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처음 사랑을 해서 그런 것일까. 첫사랑은 첫 맛이 단, 그러나 끝 맛이 씁쓸한 초콜릿과 같다. 실패한 사랑이 뭔들 그렇지 않겠냐만 처음은 언제나 더욱 강렬하게 기억에 남곤 한다. <건축학개론>은 그런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을 다룬 영화로, 90년대 첫사랑을 나눈 두 명의 대학생이 시간이 흘러 현재 다시 만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는 기존의 많은 영화가 다루었던 첫사랑의 설렘과 아픔이라는 주제를 건축과 음악을 통해 색다른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다. 건축과인 승민과 음대생인 서연은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게 되고, 수업의 첫 과제인 ‘자신의 동네 체험하기’를 하던 중 우연히 마주친다.

서연: 우리 이렇게 하자. 난 건축과도 아니고, 이 동네도 잘 모르고... 근데 넌 건축과고, 여기서 오래 살았고... 그러니까.. 숙제를 같이 하는 거 어때?
승민: ... 예? 그게... 뭐가 공평하다는 건지...?
서연: 근데 왜 말 안 놔? 같은 1학년인데.
승민: ... 먼저 노세요.
서연: 나 아까부터 놨잖아. 말 논 거 안보여?

  기자는 그 둘의 첫 만남이 되었던 누하동으로 떠났다. 서촌의 한 동네인 누하동은 경복궁의 왼쪽 부근에 있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탄 버스 안에서 기자는 사랑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되뇌었다. 겉보기엔 복잡하지만 가만 들여다보니 사랑의 조건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처럼 사랑의 조건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우연히 사는 곳이 같은 동네임을 알게 된 서연과 승민이 어색하게 말을 터가는 것처럼 사랑은 만남을 시작으로 한다. 또 다른 조건에 대해 생각해볼 때쯤, 버스는 광화문에 도착해 있었다. 광화문에서 20분 정도를 걸었을까. 어딘가 눈에 익은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박한 현대식 주택과 함께 골목 사이로 한옥 주택들이 보이는 누하동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지만 어색하지 않고 정겨웠다.

 

  서연과 승민은 함께 과제를 하던 중 사람이 살지 않는 한 낡은 한옥에 들어간다. ㅁ자 모양의 한옥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승민은 음대생인 서연이 왜 건축학개론 수업을 들으려 했는지 알게 된다. 나아가 관객들은 서연이 누구를 좋아했는지뿐만 아니라 승민이 누구를 좋아하고 있는지까지 알게 되는 장소이다. 아쉽게도 기자는 그들이 머물렀던 한옥을 발견했지만, 영화와 달리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기자는 서연과 승민이 처음 이곳에서 말을 트고, 자신의 마음을 애써 들키지 않으려 하는 모습들을 떠올리며 한참이나 그곳에 서 있었다. 누하동의 주인 없는 한옥은 영화 속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승민과 서연은 아무도 없는 한옥에 들어와 그곳을 그들만의 아지트로 만든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느껴갈 때쯤, 승민은 서연에게 첫 눈이 올 때 이곳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사랑의 시차가 달라서였을까. 첫눈이 오는 날, 승민은 오지 않았고 서연만이 한옥을 찾았다. 이처럼 한옥은 첫사랑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곳이자 그 사랑의 아픔을 확인시켜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누하동에서의 첫사랑은 과거가 된다. 누하동을 떠나면서 다시금 사랑의 조건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바로 사랑에 대한 확인이었다. 승민과 서연 이 둘이 서로를 좋아했음에도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건 사랑에 대한 확인을 미루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서연: 우리 10년 뒤에 뭐하고 있을까?
승민: 난 건축하고 넌 피아노치고 있겠지.
(중략···)
서연: 나중에 이런 데다 집 짓고 살 거야. 그때 니가 지어줘, 공짜로 알았지?
      난 어떤 집에서 살 꺼냐면...(중략···)

  사랑의 아픔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처럼 승민과 서연도 첫사랑의 아픔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 그 아픔이 해소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서연은 20년 만에 승민에게 찾아가 그녀의 고향인 제주도에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서연이 승민에게 부탁한 집은 영화 촬영을 위해 실제 지었다고 한다. 촬영이 끝난 후에는 서연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기자는 그 집을 보기 위해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는 서울의 추운 날씨와 달리 포근하였다. 제주공항에서 2시간여 동안 버스를 타고 도착한 ‘서연의 집’에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서귀포 앞바다가 보이는 확 트인 창문이 있는 1층과 정원에 누워 바닷소리를 들을 수 있는 2층 옥상은 기자를 포함해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승민은 서연이 요청한 집을 짓기로 한다. 그들은 자연스레 과거 대학생 시절처럼 서로에 대해 다시 알아가게 된다. 현재 승민은 결혼 할 예정이며, 서연은 이미 결혼을 경험하고 이혼을 하였다. 영화 막바지, 어느덧 집은 완공되었고, 서연은 자신의 집에 짐을 푼다. 미국에 갈 승민과 제주도에 남는 서연은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대학생 시절 이야기를 속 시원히 이야기한다. 그러던 중, 승민은 과거 자신이 서연을 위해 만들어 주었던 집 모형을 서연이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승민: 이걸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어? 왜? 집 지어줄 사람이 그렇게 없었어? 왜 굳이 나한테? 이제 와서 뭐 하러? 왜?
서연: 궁금해서. 너 어떻게 사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승민: 그게 이유야? 그냥 궁금해서. 그게 다야? 그래서 이딴 걸 지금까지 갖고 있는 거야!
서연: 그래! 그러면 안 돼? 그래도... 나름 내... 첫사랑이었는데. 좀... 그러면... 안 돼? 이씨...

  서연과 승민은 그날 오해 가득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푼다. 영화는 그 둘의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고 끝을 맺는다. 첫사랑을 끝사랑과 동일시하지 않는 이 영화는 첫사랑이 주는 아련한 감정을 현실에 발붙이게 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더욱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이 애틋한 것은 아닐까. 기자는 영화의 주제곡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서연의 집을 떠났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 기자는 아련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회상해보았다. 노랫말 가사처럼 첫사랑은 많은 날이 지나고 문득 잊혀져 가던 기억이 다시 생각나는 그런 아련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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