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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반가운 세상, 유경(柳京)의 근원지인 팔달문 시장에 가다버드나무 길을 따라 걷는 『왕이 만든 시장 -그곳에서 만난 유상들』(2011)

역을 중심으로 호텔과 백화점이 줄줄이 들어선 수원역은, 그야말로 북새통과 다름없었다. 저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각종 호객행위, 그리고 전도사들의 종교 권유를 피해 기자는 팔달문으로 향하는 버스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수원역에서 팔달문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스에 기대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어느새 버스는 ‘수원행궁’ 앞에 정차했다. 내려서 조금 걷다보니 우뚝 솟은 팔달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의 중심부에 남대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수원에는 팔달문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고 있다. 팔달문 인근에는 화성행궁을 따라 둘러진 성곽 안으로 총 여덟 개의 시장이 펼쳐져있다. 장을 보러, 혹은 구경을 하러 온 이들로 팔달문 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 그러나 이곳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대형마트와 백화점에 밀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장소였다. 220년이 넘도록 굳건히 이 자리를 지켜온 팔달문 시장의 명맥이 그 빛을 잃어갈 때쯤, 시장 상인들과 수원시 문화사업단은 힘을 합쳐 팔달문 시장을 되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열었다. 낡고 더러운 재래시장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새롭게 태어날 근원적 뿌리를 조선 22대 임금 정조와 수원에 얽힌 역사적 배경에서 찾은 것이다. 그들은 팔달문 시장에 ‘왕이 만든 시장’이라는 테마를 덧붙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변화의 물꼬를 틔우기 시작했다. 

 

개혁의 씨앗을 뿌릴 도시는 기득권자 노론이 장악한 한양으로는 아니된다. 새로운 곳, 새로운 무대가 필요하리라! 나는 수원을 상업도시로 건설하여 강하고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다.

 


정조는 신분계급으로 정체된 조선을 살리기 위해서는 상업이 번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라가 강해질 수 있는 근원을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가장 천시 받아왔던 상공업에서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양의 상권은 이미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고 금난전권을 비롯한 막대한 이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에 1791년, 정조15년 금난전권을 둘러싼 시장개혁이 이루어진다. 서울 시전상인들의 독점 상업특권을 없애기 위해 정조는 모든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 보장을 선포했다. 그리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한 수원에 상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한다. 왁자지껄 정이 넘치는 소리를 따라 팔달문 시장 초입에 다다르자 때아닌 비가 내렸다. 비는 소나기처럼 잠시 동안만 내렸지만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화창해 참으로 이상한 날씨였다. 청과물 수산 아저씨는 문 앞에 놓인 포도가 비라도 맞을세라 분주하게 덮개를 씌웠다. 그동안 장을 보러 집 근처 마트에만 다녔던지라 시장은 참 오랜만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자에게 그곳은 후각으로 기억되어 왔다. 전통 재래시장에는 특유의 냄새가 존재한다. 물론 그 시장에서 파는 온갖 음식들과 진열되어 있는 이런저런 물건들에서 나는 냄새가 뒤섞인 것이겠지만, 오직 재래시장에서만 맡을 수 있는 ‘정겨운’ 냄새가 있다. 어릴 적, 명절날이 되면 할머니 손을 잡고 따라나섰던 시장에서 꼭 이런 냄새를 맡고는 했다. 이제는 할머니마저도 간편한 마트를 찾으시기 때문에 그동안 재래시장에는 꽤 오랫동안 발길을 끊고 살았는데, 카메라를 들고 다시 이곳을 찾은 기자의 눈에 시장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원천(川)을 중심으로 버드나무를 심은 정조의 숨은 뜻을 간파한 전국의 눈 밝은 선비들은 하나 둘씩 팔달문으로 모여들어 상인이 되었다.

 

지금은 수원천의 물줄기가 도시 속에 흐르고 있지만 당시의 수원(水原)은 지명과는 다르게, 물을 끌여다 쓰기 부족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수원에 사회기반시설을 닦기 위해 정조는 곳곳에 수많은 버드나무를 심었다. 버드나무는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물길을 확충할 ‘방안’이었다. 이에 따라 저수지와 농경지가 만들어지자 이곳에서 백성들은 한데 모여 살 수 있었다. 정조는 수원을 ‘유경’이라 불렀다. ‘버드나무가 많은 수도’라는 뜻의 유경은, 서울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하고자 했던 정조의 바람을 담고 있는 별칭이다. 오늘날 수원은 버드나무가 매우 많은 동네라는 의미의 ‘버드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싱그러운 버드나무의 잎사귀가 흩날리는 이곳에 화성행궁이 지어졌다. 모두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비난했지만, 정조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화성의 남쪽에 위치한 팔달문에 시장을 열었다. 각 지역에 흩어졌던 선비들은 임금의 뜻을 따라 짐을 꾸렸다. 

자리를 옮기자 지동교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니 영동시장과 그 맞은편에 위치한 지동시장, 못골시장 등이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시장들은 공산품, 한복, 공구 등 대형백화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개성이 넘치는 상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더불어 상인들의 푸근한 인심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넉살 좋게 애교를 잘 부리면 비록 이윤이 적게 남더라도 웃음과 함께 ‘덤’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트에서 아무리 할인행사를 하고, 1+1이 써진 표지판을 내걸지라도 시장이 갖는 매력을 따라오기란 힘든 일이다. 지동시장의 높은 지붕 위에 태극 빛의 호롱이 줄줄이 매달려 바람에 흩날렸다. 2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견뎌왔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힘차게 흩날리고 있었다.

 

꾀꼬리여 노래하라 버드나무여 춤춰라 수원천이 다시 하늘을 만나고 이제 사람이 반가운 세상이다. 이 아름다운 날, 팔달문이여 세상의 중심에 서라.


정조는 내탕금 6만 냥의 밑천을 조달하면서 전국 곳곳에 있는 대상인들을 불러 모았다. 정조의 부름에 응한 상인들은 팔달문 시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찍이 상업에 투신한 선비상인, ‘유상’들이었다. 팔달문의 ‘팔달’은 유상들의 정신을 담은 내용이다. ‘숙달 능숙한 솜씨로 천직에 통달하고 이달 이치를 따져서 이익을 추구하되, 예달 예의를 갖추어 성달 성의를 다하니, 재달 재산을 불리고 영달 존경을 받는다.’ 이러한 수원 유상들의 정신인 팔달이 깃들어서일까, 찾아드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팔달문 시장 상인들의 표정은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차다. 팔달문 시장이 그 명성을 이어 2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오래토록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유상’의 정신을 이어가며 팔달문 시장을 지키고 있는 지금의 상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 수원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통시장을 보유한 자치단체로 우리나라 전통시장 활성화에 견인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원대한 꿈을 꾸었던 젊은 왕 정조는 결국 뜻을 다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정조가 꿈꾸었던 세상의 한 부분, 수원의 팔달문 시장은 2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남아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다. 정조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부흥할 수 있었던 팔달문 시장의 재건사례는 백성들이 힘을 가지길 누구보다 바랐던 정조의 오랜 바람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일지 모른다. 시장을 나서면서, 기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소한 시장 통닭 한 마리를 시켰다. 통닭 한 마리에 담긴 온정이 느껴져서일까. 조만간 또다시 기자의 발걸음은 이곳으로 향할 것 같다.  

김보문 기자  qhans0211@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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