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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탈(脫)일상 사이에서 나타난 숨겨진 욕망, 『무진 기행』(1964) 

흐르는 것들의 흐르고 싶지 않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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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 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중략…)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순천에 도착하기 전, 삼십분 남짓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과 기차에 몸을 맡기니 자연스레 따라오는 결과였다. 오랜만에 탄 기차에 삼십분 정도밖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꽤나 야속했다. 흐르는 기차와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지루한 수업, 버거운 기사 마감, 지속되는 스트레스 그리고 소소한 행복…. 기자의 일상이다. 흐르는 시간만이 기자의 모든 것을 결정했었다. 그런 기자에게 순천 기행은 평소와 다른 하루였다. 흐르는 시간에 기자는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다. 『무진 기행』(1964)의 주인공 윤희중도 기자와 비슷하다. 희중은 서울의 세속에 찌들어 지칠 때 즈음 아내로부터 무진행을 권유받는다. 잘 나가는 제약회사 사장님의 딸과 결혼한 그는 회사업무라는 이유로 하릴없이 무진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잠시나마 탈(脫)일상의 날들을 접하게 된다. 흐르는 시간에 단지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 흐르는 시간의 물결을 바꿀 수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잡념에 빠져 그나마 남은 삼십분도 그새 써버렸다. 새벽부터 출발한 탓에 피곤한 몸을 달래며 기차에서 내렸다. 순천은 남쪽이기에 따뜻할 것이라는 편견을 한 번에 깨주는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구름은 하늘을 자욱이 뒤덮어 버려 따뜻할 것만 같던 남쪽의 햇볕을 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무진의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순천은 흐리고 고요했다. 만화영화 같은 것을 보다 보면 가끔 안개에 둘러싸여 오묘한 분위기를 띠는 신비한 장소가 등장한다. 일상에서 벗어난 듯한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말이다. 기자에게 오늘의 순천은 일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었다. 흐린 날씨가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없는 휑한 순천역의 모습은 서울 토박이의 기자에게 너무나 낯설어 흥미롭기까지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전라도 사투리와 눈에 띄는 토속적인 모습의 역전시장, 그 특유의 냄새가 기자를 자극하였다.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내가 하는 생각이란 항상 그렇게 엉뚱한 공상들이었고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아니 무진에서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었다.

 

무진에서 희중은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다른 생각을 하곤 한다. 주로 아무런 부끄러움 없는 엉뚱한 생각들이다. 오랜만에 일상에서 벗어난 그는 무진에서 꽤나 솔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지낸다. 무진은 그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욕망을 이끌어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회사업무에 치이며 살아가는 희중의 서울과는 매우 달랐던 것이다. 순천도 마찬가지로 기자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식사를 하지 못한 기자는 먼저 낯선 곳의 음식들을 갈망했다. 온갖 음식점이 보였지만, 서울에서는 접할 수 없는 낯선 음식을 만나고 싶었다. 순천역에서 얼마 안 떨어진 식당가를 가자 그곳에서는 다양한 가격에 꼬막정식을 팔고 있었다.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시작했다. 따뜻한 흰밥과 짭짤한 양념 꼬막, 고소하게 씹히는 꼬막전, 기름진 생선구이, 꼬막이 마구 씹히는 비빔밥 그리고 곁들여 마신 순천의 막걸리. 사실 서울에서 먹는 것들과 특별한 맛의 차이는 없었다. 그저 낯선 지방의 낯선 음식이란 사실이 기자를 만족스럽게 해주었다.

 

" 미칠 것 같아요. 금방 미칠 것 같아요. 서울엔 제 대학 동창들도 많고... 아이, 서울로 가고 싶어 죽겠어요" 여자는 잠깐 내 팔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었다.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찡그리고 또 찡그렸다. 그러자 흥분이 가셨다.

 

일상에서 벗어난 희중은 숨겨온 욕망들을 억누르기 힘들어한다. 지루한 서울 생활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움을 요구한다. 그중 하나는 새로운 이성에 대한 갈망이다. 그는 무진 인근 학교의 여교사 하인숙을 만난다. 탈(脫)일상에서 만난 여인은 꽤나 새로워서 그를 만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기자는 식사를 마치고 순천만 국가정원을 향했다. 한눈에 들어온 순천만 국가정원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더구나 일요일이기에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다. 가족, 연인, 친구. 그들이 만들고 있는 사랑이 흐린 순천의 날씨마저 밝아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자는 그들의 사랑으로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순천만 국가정원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기자가 원하는 것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순천만을 향하는 모노레일을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모노레일 역은 꽤 시끄러웠다. 많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기자가 타야 할 모노레일이 들어오고 있을 때 즈음, 수많은 목소리 중 순간적으로 신선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앙칼진 목소리의 전라도 지역 사투리였다. 기자의 숨겨온 욕망이 자극받았다. 기자도 한번 이마를 찡그려 보았다. 찡그리고 또 찡그려 보았다. 그러자 기자가 탄 모노레일은 순천만을 향해 출발했다.

 

 

"그렇지만 여긴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인걸요."

 

기자는 무사히 순천만에 도착했다. 순천만을 보고 있으니 새로운 욕망이 생겨났다. 무언가에서 벗어나고픈, 바람 같은 자유였다. 충동적으로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자가 바라본 순천만은 정말 작품에 나온 배경 그 자체였다. 『무진 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이 소설의 배경이 순천만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고향인 순천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아 현실과 대조되는 탈(脫)일상의 공간으로 지정한 것이다. 순천만에 다다르니 비로소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순천만에서는 인위적인 무언가로 인해 바람이 막히는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인숙의 말대로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이다. 그저 휘날리는 갈대와 자유만 있을 뿐이다. 이곳만큼 서울의 일상과 대조되는 공간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곳만큼 사람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장소는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이번 주 기사 마감을 생각하니 방금의 순간적인 충동은 꽤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시적으로 얻은 자유에 만족해야만 했다. 늦은 저녁이 돼서야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금요일, 토요일 연이은 마감이 끝난 후 일요일 새벽에 떠난 일정의 여행인지라 버스에 앉자마자 피곤함이 쏟아질 듯이 몰려왔다. 바쁜 일상 속 여유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한결같은 일상이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잡생각도 잠시, 흐르는 시간과 버스에 다시 몸을 맡겼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버스 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마치 달콤했던 순천 기행에 젖어 있으라며 버스가 기자를 붙잡는 것 같았다. 몽롱했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니 창문 밖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강 다리의 야경과 그 불빛들에 비친 한강 물줄기. 등굣길에 매일 보는 한강이지만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강물은 잠시 쉬어갈 틈도 없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정해진 방향을 향해 계속 치열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꽤나 가엾은 존재이다. 흐르고 싶지 않아도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니, 강물이 세상 슬퍼 보였다. 창가에 비친 흐르는 강을 동정하며 계속해서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창문에 반사되어 어렴풋이 비추어진 기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자는 생각했다. 한 번쯤은 흐르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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