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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재구성

(지난 호에서 이어집니다.)

가족애를 위한 아파트 평면 만들기

거실이라는 용어가 우리 건축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이다. 그 이전 한옥에 살 때에는 우리나라에 거실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한옥에는 단지 대청마루가 있을 뿐이었다. 한옥은 중정 형식의 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사랑채와 안채가 있고, 안채를 구성하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다. 밥은 보통 부엌에서 상을 차려 안방으로 들고 와 앉아서 먹었다. 식탁이라는 것이 따로 없을 때, 안방은 이부자리를 펴면 침실이 되고 상을 들이면 식탁이 되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수백 년을 살던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지었을 때에도 전체적인 틀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평면도를 보자. 보통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이 있고, 더 들어가면 부엌과 식탁을 놓는 자리가 나오고, 그 앞에 거실이 위치한다. 그리고 더 들어가면 방이 2개 나온다. 이러한 전형적 쓰리베이(3-bay) 아파트의 구성은 한옥 마당이 거실이 되고, 대청마루 부분이 식탁을 놓는 자리가 된 것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때 각종 농사일의 작업장이었던 마당에 지붕을 씌운 것이 거실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평면적으로 보면 아파트 구성과 한옥은 지극히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관계의 눈으로 이 공간을 살펴보면 크게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한옥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가 있었으며 옆으로 돌아 마당으로 들어간 후 대청마루에 올라 한번 방향전환을 하고 안방이나 건넌방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자연히 안방이나 건넌방에 앉아서 창문을 바깥으로 열어젖히면 마당을 볼 수 있게 된다. 경우에 따라 툇마루로 나서면 외부 공간인 마당의 경관을 툇마루에 앉아서 즐길 수가 있다. 이 툇마루는 우리나라 건축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공간이다. 처마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처마 아래는 비가 올 때 비를 피할 수 있는 내부면서 동시에 신발을 신지 않고서도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공간이다. 고로 외부와 내부의 중간적인 성격을 갖는 특징을 알 수 있다. 현대 아파트의 발코니도 이런 중간적인 성격이지만 신을 신고 나가야한다는 점에서 툇마루와는 약간 다르다. 게다가 발코니에는 높은 난간이 있다. 따라서 난간이 낮거나 아예 없는 툇마루에 비해 외부공간과 더 단절된 느낌을 준다. 

다시 한옥으로 돌아가서 공간의 시퀀스를 살펴보자. 한옥은 외부 공간인 마당을 거쳐 실내 공간인 집안으로 들어간 후, 방 안에서 창문을 열면 다시 외부공간인 마당과 마주하게 되는 순환 네트워크 구조를 띠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의 경우는 다르다. 아파트에 복도를 거쳐서 거실을 지나게 되고,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두 바깥을 향한 창문뿐이다. 만약 거실이 마당에 지붕만 씌워진 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최초의 건축가는 안방에서 거실을 향한 창문을 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보다도 심리적으로 더 넓게 느껴지는 아파트 평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창문을 거실이 아닌 바깥으로만 내었기 때문에, 아파트에서는 일단 방에 들어가면 거실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다이어그램이 만들어진다. 이는 마치 갈라진 나뭇가지 같다고 하여 “수목적” 관계라고도 한다. 나뭇가지는 굵은 가지에서 잔가지로 갈라질수록 방향이 나누어지고, 나누어진 나뭇가지의 끝끼리는 다시 연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파트에서는 복도에서 나뉘어 일단 방으로 들어가면 방끼리 연결이 되지 않고 분리된 공간구성을 띠게 된다. 아이들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방문을 닫으면 나머지 식구들과는 단절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수목적 관계의 공간 구성은 서구적인 사생활을 만드는 데는 효율적이다. 하지만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기에는 좋지 않은 공간 구성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모든 방에 거실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자. 그렇게 되면 얼마나 풍요로운 공간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가? 혹자는 그냥 문을 열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 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창문과 문은 엄연히 다른 건축요소이다. 문은 바라보면서 동시에 내가 들어갈 수 있다. 문은 프라이버시를 “0”로 만드는 요소이다. 하지만 창문은 서로 바라볼 수는 있으되 건너갈 수는 없게 해주는 건축 요소이다. 창문으로 연결된 공간은 적절한 사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느슨한 관계를 형성해주는 장치이다. 부모는 안방에서 책을 읽고 있고 거실 너머 또 다른 창문으로는 자녀가 공부하는 모습이 보이는 아파트가 필자가 보고 싶은 우리나라 아파트의 풍경이다. 그런 모습의 집에서는 가족끼리의 대화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주택은 줄기 세포

건축계에는 흔히 노벨상에 비유되는 프리츠커라는 상이 있다. 1979년을 시작으로 하이야트 재단에서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는데, 일차 심사를 거친 후에는 하이야트 재단에서 제공하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실제로 건물을 가서 본 후에 최종 수상자를 선정한다고 한다. 건축이라는 것은 인간이 벌이는 사업 중 매우 큰 돈이 드는 활동에 속한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수많은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 문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를 통합한 종합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상의 의미는 단순히 건축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나라의 문화의 수준에 따른 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한 번도 수상한 적이 없으며,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포트투갈은 알바로 시자라는 수상자를 배출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웃나라 일본이 역대 6회에 걸쳐서 수상했다는 사실이다. 뭘 해도 일본과 비교를 하고 라이벌로 여기는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좀 충격이지만 그게 우리나라 건축의 현 성적표이다. 축구나 야구 한일전에 패했을 때의 충격을 생각하며 비유하자면, 축구를 6:0으로 진 것이라고 하면 좀 이해가 쉬울까? 

우리나라 건축이 뒤쳐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아파트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지진이 많아 고층건물에 내진설계를 해야 한다. 그래서 고층아파트 건설 시 우리나라보다 공사비가 더 들어간다. 그래서 전후(戰後)에 대량으로 주거를 공급해야하는 이유는 똑같은데 우리나라는 현재 국민 절반이 넘게 아파트에 살고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주택에 많이 사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식당에 가도 통일해서 주문한다. 반면 일본인은 혼자 먹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일본은 무엇이든 혼자 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자 너도 나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반면에 일본은 그대로 주택에 살아왔다. 몇 천 세대가 들어서는 아파트단지 하나는 대형설계사무소에서 몇 명의 건축가가 디자인하면 된다. 하지만 몇 천 세대가 주택으로 공급되어야 한다면 수백 명의 건축가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소규모 주택 건설은 대형사무실 조직이 시공하기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주택수요가 큰 일본에서 소규모 건축설계사무소가 생존할 수 있는 시장 형성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건축적인 면에서 보면 주택은 모든 건축의 줄기세포와 같다. 주택에 방을 여러 개 만들면 호텔이 되고, 거실을 넓게 하면 컨벤션 센터가 되고 마당을 키우면 경기장이 된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젊어서부터 주택 건축을 많이 해봐야 한다.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신진건축가들이 주택 건축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이러한 여건이 건축가들 선수층을 두텁게 만든다. 마치 우리가 WBC 야구대회에 나갈 때 우리나라는 최상 수준의 선수들로 팀 하나를 꾸려나갈 정도밖에 안 되는 반면 일본은 선수층이 두터워 대표팀을 서너 개쯤 만들 수 있다는 사례와 비슷한 경우다. WBC같은 단기전에서는 일본을 이길수 있지만 7차전까지 가는 시리즈 승부를 한다면 일본야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건축시장의 배경이 우리나라 건축을 죽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파트가격이 오르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아파트를 선호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뜨거운 물이 나오고 춥지 않고 주차가 가능해서 아파트로들 이사를 갔지만, 지금은 웬만한 신축 주택도 냉난방과 온수는 다 해결이 된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 외에도 자연을 가깝게 즐기고 싶은 현대인의 욕구 등이 더해지며 한국인들도 점차 주택을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확산된다면 우리나라 건축가들의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 향후 프리츠커 상도 기대해 볼 만할 것이다.

 

골목과 스마트폰

얼마 전 “요즘 왜 사람들이 북촌 같은 골목길 상권으로 많이 갈까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필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오락적 자극을 찾는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자연 공터에서 잠자리나 물방개를 잡으면서 뛰놀았던 기억이 있다. TV는 저녁 6시에 나오는 만화영화 보는 게 고작이었다. 세월이 흘러 공터는 줄고 TV 볼거리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TV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TV를 본다는 것은 결국 변화하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뇌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TV와 극장 같은 영상매체에 자극을 받다보면 자연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거실과 극장은 모두 실내공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외부의 자극과 자연이라면 TV는 자극만 있고 자연은 없다.

이제 골목을 살펴보자. 골목에는 우선 자연이 항상 있다. 골목길과 복도는 둘 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이지만 골목에는 항상 하늘이 있고 복도에는 형광등만 있다. 골목 상권은 몇 발자국만 걸어도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변화의 밀도가 높다. 옷가게와 구두 가게에서 구경하거나 사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식당에서 뭔가 먹을 수도 있고, 피곤하면 카페에 앉아서 쉴 수도 있다. 한마디로 근본적인 ‘의식주’가 다 해결된다. 게다가 자연인 하늘을 계속 볼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거리에 나가면 다른 이성을 접할 기회도 높아진다. 본능상 붐비는 곳에 갈 수밖에 없다. 

그럼 혹자는 “골목은 예전에도 그랬는데 왜 지금 사람이 더 가는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이유는 바로 ‘스마트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골목 상권에 나오면 실내에서 보는 영상매체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스마트폰을 통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영상 매체를 즐길 수 있다. 더 이상 답답한 방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욕구, 외부적 자극,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스마트폰이 주는 자유가 합쳐진 결과를 통해 최근 사람들이 점점 더 골목길 상권을 찾게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유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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