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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문장론』 쇼펜하우어 지음, 지훈, 2005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 이정환 교수가 추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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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에서 읽고 쓰는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토록 큰 적이 있었을까? 잠에서 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밥을 먹으면서, 화장실에 머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읽고 쓴다. 심지어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도 문자를 주고받으며 소통한다. 읽고 쓰는 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우리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읽고 쓰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하면 빨리 읽고, 어떻게 쓰면 ‘좋아요’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지만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읽기와 쓰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그저 문자를 실어 나르는 기계가 되어 가고 있다.

『쇼펜하우어 문장론』은 읽기와 쓰기가 목적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이른바 “지식정보화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읽고 쓰는가?” 이 물음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이렇게 답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일구어내기 위해서만 읽어야 하고, 그렇게 일구어낸 사상을 다른 이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기 위해서만 써야 한다.” 책 전체에 걸쳐 반복하고 있는 이 말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읽고 쓰는 일이 본래 가지는 수단적인 의미와 한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수단적인 의미를 넘어설 경우 읽고 쓰는 일이 우리에게 어떠한 해악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책 읽기는 자신의 머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려는 행위이자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책을 통해 경험한 다른 사람의 사상은 다른 사람이 먹다 남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읽기가 가지는 피동성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읽는 일에 ‘내맡겨질’ 경우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지도 못하는 정신적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용수철이 계속 압력을 받아 끝내 탄력을 잃듯 정신도 다른 사람의 사상에 의해 항상 억눌리다 보면 결국 유연함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서는 오로지 자신의 사상을 일구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읽는 일은 항상 비판과 성찰이라는 정신의 노고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를 하기 위해서는 저자와 동등하거나 혹은 그를 능가하는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맹목적인 읽기가 습관화된 우리에게 던지는 냉엄한 충고이다.

쇼펜하우어는 글쓰기도 자신이 일구어낸 사상을 온전히 전달할 목적으로만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글쓰기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는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경우, 둘째는 쓰면서 생각하는, 또는 쓰기 위해 생각하는 경우, 셋째는 모든 생각을 끝마치고 쓰는 경우이다. 무엇을 쓴다는 것은 오직 세 번째 경우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배설에 가까운 글쓰기가 만연한 우리 시대에 적확한 분석과 제언이 아닐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모든 생각을 끝마치고 쓰는 글은 간결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문체를 뿜어낸다고 말한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순수하고 명확하게, 간결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며, 단순함이야말로 진리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문체를 위해 문법을 파괴하는 일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미세하고 정교한 문법을 정확히 지켜 글을 쓰는 일은 사상과 사태의 온전한 전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1840년대 지식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 다소 받아들이기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읽기와 쓰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감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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