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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를 지닌 그들의 삶, 『속초에서의 겨울』(2016)

속초에서의 겨울 그리고 외로운 한 이방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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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속초행 고속버스에 탑승했다. 기자가 속초에 처음 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다. 겨울 바다를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스무 살 소녀는 속초 바다의 시원한 바람과 알싸한 내음을 잊지 못한 채 어느덧 기자란 이름으로 속초를 다시 찾았다.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두 시간 반. 좌석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사이 기자는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이윽고 햇살이 눈부셔 밖을 보니 한가득 눈이 쌓인 산등성이가 보였다. 올해 겨울엔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아 내심 서운한 마음이 컸는데, 그야말로 ‘선물’ 같은 광경이었다. 그렇게 기자는 설렘을 가득 안고 속초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실 『속초에서의 겨울』(2016)은 기자의 추억과는 다르게 속초를 다소 차갑고 외롭게 표현한다. 기자는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한 채 이 추운 겨울, 고독한 두 주인공을 따라가며 외로운 속초 여행을 시작했다. 

“그럼 프랑스어도 하겠군요.”

“잘은 못해요.”

사실, 내 프랑스어는 우리가 주고받는 영어보다 나았지만 난 주눅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아버지 얘기를 하려다 참았다. 그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젊은 여인, 그리고 노르망디에서 속초로 작업의 영감을 찾으러 온 중년의 만화가 케랑. 둘은 속초의 한 펜션에서 직원과 손님으로 만나게 된다. 여인은 아버지와 출신이 같은 케랑에게서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낀다. 둘은 속초 앞바다에 펼쳐진 해변을 걸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기자도 그들이 걸었을지 모르는 속초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가 보았다. 파도가 바닷바람에 쩍쩍 갈라지고 이동하며 모래를 휘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혼혈의 여인은 어째서 그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피한 걸까. 

 

‘그는 결코 나처럼 속초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속초에서 태어나지 않고는, 그곳에서 겨울을 나보지 않고는, 그 냄새들과 문어를 모르고는 그곳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고는.’

 

그와 그녀는 나란히 걸으며 속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그는 그녀만큼 속초를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그 외로움을 모를 것이라고. 과연 그녀는 어떤 나날들을 겪어온 것일까. 기자는 그녀의 삶을 궁금해하며 속초의 골목들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획일적이고 규칙적인 서울의 모습과는 달리 속초는 다채롭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이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구두방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속초만의 정취를 더욱 빛내고 있었다. 기자에게 속초는 정겨운 고향 같은 곳이기에, 그녀의 외로움이 이해되지 않아 내심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어릴 적에 엄마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기억해보려 애썼다. 텔레비전. 해변. 우리는 사람들과 거의 접촉이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엄마는 수업이 끝나는 시각에 맞춰 날 데리러 왔다. 하지만 다른 엄마들과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반 친구들이 나한테는 왜 아버지가 없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버스를 탈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나는 수업이 끝나면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릴 적 그녀와 부인을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그녀에게 속초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꿋꿋이 살아내온 장소다. 오랜 시간을 그녀는 투정 한 번 부리지 못한 채 홀로 견뎌왔을 것이다. 속초 시내를 걷던 기자는 문득 이곳을 혼자 걸어왔을 어린 소녀를 상상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바쁜 걸음으로 소녀를 지나쳤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 어린 소녀가 이방인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속초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언제나 낯선 이방인일 그녀를 그 누구도 감싸 안아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외면하던 사람들. 그녀가 케랑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처 때문은 아닐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그녀를 떠올리며 기자는 청초호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케랑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선들은 고르지 않았다. 그는 선들을 여러 번 그렸다. 무엇을 그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유난히도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퍼런 하늘과 구름이 호수에 비치고 그 위로 흐르는 물결의 잔잔함이 기자의 마음을 녹여주었다. 호수 근처에 들어선 카페를 바라보며 기자는 그녀의 ‘외로움’을 헤아려 보았다. 감정도 전파되는 것일까. 창가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커플과 단란한 가족들을 보니 기자도 새삼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기자는 그 새로운 감정을 잊어보려 무작정 글을 써 내려갔다. 마치 매일 밤 그림을 그린 케랑처럼. 그러던 중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도 기자와 같았을까. 기자는 도대체 어떤 글을 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침을 축축하게 묻은 종이 뭉치 하나가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펼쳤다. 여자는 찢어져 있었다. 

 

케랑은 매일 밤 한 여자의 온전한 몸을 완성시키기 위해 선 그리기에 매달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림은 완성되지 못한 채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만다. 

 

제발 그가 그녀에게, 그 마녀에게 생명을 주기를, 그녀가 마침내 살기를, 내가 그녀를 파괴할 수 있기를! 

 

그녀는 케랑의 방에 몰래 들어가 그의 그림을 쓰레기통에서 꺼낸다. 그리고 외친다. 그림 속 그녀가 살아나기를. 어찌하여 그녀는 그보다도 그림의 완성을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 기자는 눈을 감고 무의식의 세계 속으로 스스로를 온전히 맡겨본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 속 여자에 빗대어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나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낯선 이방인은 속초와 프랑스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을 것이다. 누군가 나타나 자신의 두 정체성을 결합시키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주기를 말이다.

 

화첩의 가장자리 말고는 다른 윤곽도, 다른 경계도 없는 하늘로 넘쳐. 그것은 장소가 아닌 장소였다. 생각하는 순간 형태를 취했다가는 이내 해체되어버리는 그런 곳, 하나의 문턱, 하나의 통로, 눈이 떨어지면서 포말과 만나는, 눈송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그 일부가 증발되는 그런 곳. 

케랑이 속초를 떠나 자신의 고향 프랑스로 돌아갔을 때, 그의 방에는 화첩 하나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 속엔 어떠한 ‘윤곽’도 ‘경계’도 없는 선들이 조화롭게 이어져 있었다. 비로소 두 개의 정체성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여인은 화첩 속 그림을 보며 어떤 자유를 맛보았을까. 아마 기자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을 터이다. 이제 그녀가 자신의 오랜 숙제를 끝내고 어디로든지 속할 수 있는 정체성을 확립했을까 궁금해졌다. 

 

해변에는 한결 훈훈해진 바람이 불었다. 파도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딸꾹질이라도 하듯. 갈매기들이 모래를 뒤지다 나를 보고는 뒤뚱거리며 달아났다.

케랑이 속초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듯, 기자 또한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녀는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왜인지 그녀 혼자 속초에 남겨두고 가는 기분이 들어 아쉬움이 커졌다. 이런 기자의 마음을 몰라주는 건지 겨울의 해는 더욱 빠르게 숨어버리고 있었다. 어느새 컴컴해진 도로 위로 서울행 버스는 뭐가 그리 급한지 날쌔게만 달렸다. 기자는 창에 머리를 기댄 채 하루 동안 기자를 스쳐 간 많은 감정을 떠올렸다. 기자도 자아에 대한 끝없는 고민에 허우적거릴 때가, 이유 모를 외로움에 빠져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느낀 끊임없는 고뇌와 고독감을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느덧 기자는 그 힘들던 시절의 기억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와 함께 속초를 따라가다 보니 기자도 그녀처럼 온전한 ‘나’의 삶을 찾은 건 아닐까. 창밖에 비친 달빛이 그런 기자의 생각을 보듬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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