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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고 부조리에 저항하는 존재를 지향한다

지식인,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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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임현진 교수는 ‘지식인’을 인간사에 대해 고뇌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지니고 사회의 모순에 대해 고민하며 건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집단으로 규정한다. 그는 그 예로 대학생, 교직자, 문학가, 종교인 등을 제시했다. 본 기사에서 내리는 지식인에 대한 정의는 임 교수가 규정한 것과 같음을 밝혀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집단에게도 이 정의는 유효한가? ‘대학원생에 대한 폭언· 성추행 대학교수’와 ‘성범죄 가해 목사들의 여전한 목회 활동’ 등 일부 지식인의 비위(非違) 행위가 각종 언론에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전체 지식인을 단지 고위층 인사로 인식되게끔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번 기사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태평천하』, 『제3인간형』, 『광장』을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여러 행동 양상을 드러내고 지식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정답을 찾아보려 한다.

 

『태평천하』(1948)의 윤 직원 일가는 대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윤 직원 영감은 일제와 결탁하여 자신의 부를 늘리고 그것을 지키는 데 급급해한다. 윤 직원 영감의 아들인 창식도 향락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 모습을 보는 윤 직원 영감은 손자인 ‘종학’에게 기대를 건다. 그 기대란 ‘종학’이 시대에 순응하여 지역 유력 인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종학’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소설에서 ‘종학’이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 유학적 지식인들의 사회주의수용 양상과 민족운동」에 따르면 1920년대 들어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은 일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적 의식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즉, 1920년대 사회주의 활동이란 독립운동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종학’은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된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사실 ‘종학’은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지식인으로 자신의 부유한 환경에 순응하여 살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윤 직원 영감의 시대 인식과 같이 일제와 협력하여 부유하게 사는 현실을 ‘태평천하(太平天下)’로 받아들이고 시대에 순응했다면, ‘종학’ 자신만큼은 여유 있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사회의 그릇된 면을 고뇌하며 사회 모순에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위 지식인에 대한 정의를 참고할 때, ‘종학’은 가장 ‘지식인’다운 지식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존재이지 않을까.

‘종학’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한 인물이라면 『제3인간형』(1953)의 ‘석’은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조운’과 함께 문인으로서 문학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며 둘의 삶은 바뀐다. 어느 날 ‘석’과 ‘조운’은 만나게 되는데, ‘석’의 예상과는 달리 ‘조운’은 문인의 길을 버리고 운수업을 하며 기업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 ‘석’은 Y 학교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교사로 있으면서 문인으로서 한 작품도 집필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하며 교사와 문인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조운’과 헤어진 후 중얼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사명을 포기치도 그것에 충실치도 못하고 말라가는 나는?” 그는 끝내 삶 속 여러 갈래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로 남게 된다. 그와 달리 ‘조운’은 지식인으로서 전쟁 중인 사회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되지만, ‘석’과는 달리 삶에 명확성이 있다. 한편 책 속 ‘석은 정치 파동이 한참일 무렵에 Y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교는 그에게 구원의 안식처였다’라는 구절을 살펴보면 ‘석’이 혼란한 전후 사회에서 도망쳐 안식처로 인식된 학교로 일종의 ‘피신’을 했다고 해석된다. 지식인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 고민해야 할 존재임에도 그 고뇌 속에서 도망친 ‘석’은 진정한 ‘지식인’의 범주에서 멀어지게 된다. 

앞의 두 작품을 통해 ‘지식인’의 범주 양 끝에 존재하는 ‘종학’과 ‘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광장』(1960)의 ‘이명준’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해방된 남쪽에서 대학을 다니던 명준은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방송 시간에 나온 일로 불온인물이 된다. 이 일로 월북을 택한 명준은 그곳에서 기자가 되지만, 북쪽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명준은 인민군 신분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 전쟁 속에서 명준은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국군의 포로가 된 명준은 판문점의 포로송환위원회에서 중립국을 택한다. 인도행 배를 탄 명준은 자신이 탄 배를 계속 따라오는 두 마리의 갈매기에서 애인이었던 은혜와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떠올라 충동적으로 바다에 투신한다. 명준이 전쟁 이전 자신이 살던 북쪽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전쟁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행위는 지식인의 정의에 적합하기에 지식인다운 행동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투신은 ‘지식인다운’ 태도가 아니라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명준의 투신은 끝내 그가 이데올로기(Ideologie)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 깊게 사유하지 않은 채 포기해버린 모습으로 비친다. 즉, 명준은 ‘지식인’으로서 이데올로기가 촉발한 사회 모순을 해결할 방향을 사고해야 할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다만 그가 남북한 사회 속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모순을 제대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석’보다 지식인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지식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앞서 소개한 두 작품 속 두 인물이 힌트를 준다. ‘종학’은 시대의 모순을 직시하고 자신이 누렸던 부를 뒤로 한 채 일제에 맞서 대항하는 길을 택한다. ‘명준’은 남북한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고 그것의 실상을 제대로 바라본다. 두 인물의 삶을 종합해보면, 지식인답게 행동한다는 것은 시대의 모순을 제대로 직면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다운’ 것은 다음의 의미를 띠게 된다. 사회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교정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기사의 처음에 던졌던 ‘지식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제는 답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쌓여 있는 여러 사안을 비판적인 사고로 바라보고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 이것이 지식인답게 행동하는 것이며 위 질문의 가장 정확한 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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