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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Post-Truth) 시대와 이야기

가짜뉴스가 한 나라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고 심지어 대통령 선거의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음모론으로 치부하지 못하는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리처드 군터(Richard Gunther) 교수와 비교 국립 선거 프로젝트(Comparative National Election Project) 팀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로 추측되는 세력이 확산시킨 가짜뉴스가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발휘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단절된 대중의 시각과 미디어의 편향성에 따라 사실관계가 불명확한 가짜뉴스도 실질적인 의미와 진실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탈진실 현상은 비단 미국 대선이나 영국의 브렉시트 정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뿐 아니라 기후 변화와, 평면 지구 등, 과학 분야에서도 각자 입장에 편중된 진실 내러티브를 양산하며 진실의 추를 기울이기 위한 노력이 각계각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탈진실 시대에서 진리 주장의 최종 목표는 객관적 판별 과정을 거른 진실을 사유화하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재생된 ‘진실’은 상황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진실’의 변종으로 대체되며 원론의 흔적조차 인지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참된 담론에 접근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된다. 거대 담론의 신화가 해체되면서 기대했던 민주적이고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투명한 정보화 사회가 출현하기는커녕 반대로 비타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진리 주장으로 특정 ‘진실’ 추종자들의 결집만 강화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일부에 의에 대해 민주주의의 퇴행, 언론의 자유가 야기한 최악의 부작용이라 비판받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다. 본질적으로 탈진실은 사회적 자본이 감소하고, 공평한 경제적 기회가 박탈되면서 초양극화된 사회에서 구성원 간의 불신과 단절, 그리고 질서에 대한 혐오에 기인한다. ‘~충’, ‘~남’, ‘~녀’, ‘~수저’ 등으로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자학적으로 자신을 묘사하는 현상도 포괄적으로는 탈진실의 증상이 발호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임이 틀림없다.

성급하게 진실의 죽음과 그로 인한 문명의 퇴보를 선언하기에 앞서, 사실과 허구의 양립 불가능한 관계만으로 진리 주장이 가능한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역사가 과연 사실과 진실이란 엄격한 기준으로 서술된 것인지 살펴보면 보편적 인식과 다르게, 진짜뉴스만으로 역사를 구성한 적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 제3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사실과 허구가 하나로 용해된 이야기가 바로 역사이며 역사 기록학은 시학적 주체의 주관적 창의성이 개입된 픽션과 다름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실제로 일어난 역사와 허구적 서술인 이야기를 연결 수 있는 근거는 먼저, 두 장르 모두 실재로 인식되는 사건과 대상에 대한 주체적 해석이 필요하고, 그 해석으로 인해 개별적이고 은폐된 의미가 파생되며, 궁극적으로 이들은 초월적 주체가 아닌, 외부의 해석을 도용한 자아 정체성으로 인식한 주체가 서술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중재된다고 사유했기 때문이다. 

만약, 리쾨르에 동의할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진실에 대한 불신, 그로 인한 역사에 대한 불안감이 편재된 탈진실 시대에서는 허구적이고 창의적인 이야기의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역사마저 사실주의에 입각한 서술로 기록한 내러티브 양식이 아니다. 역사는 진짜뉴스와 가짜뉴스가 교차하는 동시적 시간을 서술 양식으로 경험하면서 인간의 실존적 시간, 현실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야기는 모방 체계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고안하는 미메시스의 창조적 체계이기 때문에 신념과 선입견으로 변질된 ‘진실’에 대한 맹신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 탈진실 현상의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독자의 실제적 세계와 허구적 세계를 병치하면서 현실의 일상을 재정의하고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실존적 사건과 의미를 이야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의 역량에 거는 기대와 달리 탈진실 체계에서 이야기는 온전한 하나의 진실이 아닌 복수의 대안적 진실을 양산하여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지탄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윤리적 삶의 원칙으로 삼았던 파레시아(parrhesia)를 모방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인들은 진리에의 접근, 즉 진리를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대신 숨김없이 다 말하는 윤리적 행동주의에 입각한 진리 주장과 하나로 이어지며 관계 맺기를 통해 참의 담론으로 구현되는 진실을 신뢰했다. 이 시대를 사는 스토리텔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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