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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들여다볼수록 가르침을 주는 나무,『나무의 위의』(1960)

'대인군자’이자 ‘풍도’이자 ‘꿈’이자 ‘성자’인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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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오세미 기자
일러스트레이션/오세미 기자

커다란 몸집과 넉넉한 그늘을 지닌 오래된 나무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나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온갖 역경을 견디며 비로소 모양을 갖춘 잎과 줄기, 뿌리가 보인다. 길을 걸으며 마주하는 수많은 나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대인군자(大人君子)’이기도 하고, 삶의 교훈을 주는 ‘성인(成人)’이기도 하다. 자연에서 인간 삶의 올바른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수필가 이양하(1904∼1963)는 대표적으로 수필『나무의 위의』, 『내 차라리 한 마리의 부엉이가 되어』, 『신록예찬』등을 편찬했다. 그 중에서 『나무의 위의』는 6·25 전쟁이 끝난 뒤 작가가 신변잡기식(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적은 수필체의 글)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서술하여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추구해야할 이상을 제시하였다. 나뭇잎이 가을 햇살에 무르익을 무렵인 9월 중순, 기자는 이양하의 수필『나무의 위의』(1960)에서 바라본 개쭝나무, 으름덩굴, 마로니에 나무, 은행나무의 모습을 다시금 느껴보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기자는 종로의 시내에서 개쭝나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고, 길가의 나무를 무심하게 지나치던 지난날을 뒤로 하고 나무를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참말로 잘생긴 나무다. 훤칠하니 높다란 키에 부챗살 모양으로 죽죽 뻗은 미끈한 가지가지에 체통치고는 좀 자잘한 잎새를 수없이 달았다. 보아서 조금도 구김새가 없고 거칠 매가 없다. 어느 모로 보나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풍모’다. 바람 자면 고요히 깊은 명상에 잠기고, 잔바람 일면 명상에서 깨어 잎새 나붓거리며 끊임없이 미소짓고, 바람이 조금 세차면 가지가지를 너울거리며 온 나무가 춤이 된다.”

 

▲이양하가 첫번째로 본 마로니에 공원의 개쭝나무
▲이양하가 첫번째로 본 마로니에 공원의 개쭝나무

기자는 현대에는 ‘가죽나무’라고 불리는 개쭝나무를 보자마자, 좌우가 조화롭게 대칭된 ‘데칼코마니’가 떠올랐다. 한 줄기에서 무수히 갈라진 여러 줄기, 그 줄기의 데칼코마니 같은 잎들이 바람이 불자 부드럽고 조화롭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또한 개쭝나무는 주변의 나무들과도 잘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조화롭고, 부드러우며, 활기가 넘치는 가죽나무의 모습은 여러모로 ‘대인군자의 풍모’와 다름 없었다. 
개쭝나무를 뒤로 한 채 낙상공원으로 으름덩굴을 찾아 나섰다. 기자는 아침마다 산보를 오가며 으름덩굴을 보았다던 작가에게 말을 걸듯, “참 아담한 덩굴이다. 이래서 나무가 아니라 덩굴인 건가?”라고 혼잣말을 했다. 개쭝나무가 대략 15m 크기인 것에 비해, 으름덩굴은 5m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구한 세월 히말라야 높은 준령의 거센 바람에 인종(忍從)해 온 먼 조상의 유전인지, 가지가 위로 뻗지 않고 아래로 숙였다. 검고 줄기찬 줄기와 가지에는 어울리지 않게 보드랍고 가느다란 잎새가 소복소복 떨기를 지어 달렸다. 어떻게 보면 가지마다 고양이가 한두 마리씩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고, 가지 끝마다 싹터 나오는 새 잎새는 고양이 발톱 같다. 심지어 몇 해나 되는 나무인지 아직 두서너 길밖에 되지 못하나 활짝 늘어져 퍼진 가지들의 너그러운 품이 이미 정정한 교목(喬木)의 풍도(風度)를 갖추고 있다."

으름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모습은 흡사 바나나 같았다. 또한 으름덩굴 잎의 오각형 모양은 다섯 갈래로 갈라졌는데, 잎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고양이 발톱’이, 열매로 인해 고개를 숙여 무거워진 가지에서는 ‘너그러운 품’이 연상되었다. 나무의 구석구석을 관찰하며 수필 속 표현들과 다시금 대조해 보았다. 기자는 나무를 묘사한 작가의 아름다운 표현을 읊조리며 으름덩굴을 보고 또 보고, 쓰다듬어 보기도 하였다.

▲이양하가 두번째로 본 낙상공원의 으름덩굴
▲이양하가 두번째로 본 낙상공원의 으름덩굴


으름덩굴에 대한 여운을 기자의 눈과 카메라로 넉넉히 담은 뒤, 기자는 마로니에 나무를 찾아보기로 했다. 혜화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마로니에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깊고 짙고 고요한 그늘을 가졌기 때문인지, 공원에 있는 여러 나무 중에서도 특히 책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마로니에 나무는 더욱 눈에 띄었다.

"가까운 주위의 자질구레한 나무들에 가려 있어 그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나 나무로서는 역시 잘된 나무다. 잎새는 밤나무보다 조금 큰 것이 별로 신기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줄기 밑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총총히 뻗은 데다 나무 잎새가 또 그 가지가지 밑에서부터 끝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이 나무는 속에 햇빛도 좀체 뚫지 못하고 바람도 웬만해서는 흔들지 못하는 깊고 짙고 고요한 그늘을 가졌다. 꿈의 나무라고도 할까. 아침, 저녁 대낮 한밤 꿈 안 꾸는 순간이 없다. 무슨 꿈을 꿀까 무척 다채로운 꿈일 것으로 생각되나 그 깊은 꿈은 얼른 사람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길이 없다. 여하튼 피와 살과 냄새로 된 사람의 어지러운 꿈이 아닐 것은 분명하고, 그 가운데 평화와 정일과 기쁨이 깃들였을 것만은 확실하다."

마로니에 나무는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주변의 현대식 건물 및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었다. 거대한 밑동에 걸맞게 한 잎이 손바닥만큼 거대한 마로니에 나뭇잎은 그 위엄으로 하여금 기자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나뭇잎은 7개씩 원을 만들며 이루어져 그 크기가 사람 머리 4개가 들어갈 만큼 컸다. 거대한 잎과 그늘을 지닌 마로니에 나무를 찬찬히 관찰하던 중 기자는 마로니에 나무에게서 마치 엄마처럼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는 몽환적이면서도 포근한 마로니에 나무의 모습을 보고 ‘꿈의 나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마로니에 나무’로부터 형성된 몽환적 분위기는 비로소 자연 친화적인 삶을 소망하며 고결하게 살아가는 작가의 인생을 그려낸다. 더불어 주변의 다양한 것들을 애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삶의 태도 또한, 현대인에게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이양하가 세번째로 본 마로니에 공원의 마로니에 나무
▲이양하가 세번째로 본 마로니에 공원의 마로니에 나무


마지막으로 기자는 은행나무를 찾아 ‘마로니에 공원’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성균관대학교 내부의 명륜당 은행나무 터로 향했다. 당시 작가가 은행나무를 관찰했던 눈 그대로 보기 위해 1960년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거대한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한말의 우리 겨레의 설움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도 겪고 좀 더 젊어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한 시절 나라의 준충(濬冲)이 청운의 뜻을 품고 명륜당에 모여 글 읽던 것을 본 기억도 가진 나무다. 이젠 하도 늙어 몇 아름 되는 줄기 한구석에는 동혈(同穴)이 생겨 볼썽없이 시멘트로 메워져 있지만, 원기는 여전히 왕성하여 묵은 잎새 거센 가지에 웬만한 바람이 불어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품이 쓴맛 단맛 다 보고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성자의 모습이다."

 

▲이양하가 마지막으로 본 성균관대학교 명륜당의 은행나무
▲이양하가 마지막으로 본 성균관대학교 명륜당의 은행나무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지만, 기자는 녹진한 잎과 거대한 줄기를 보고 한순간에 압도당했다. 수필 속에 나온 표현처럼 은행나무는 많은 상처로 인해 시멘트로 덮여있었지만, 그럼에도 가려지지 않는 웅장함은 단연 ‘성인’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나무의 거대함은 기자로 하여금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해, 상당히 오랜 시간 기자는 은행나무의 곁에 머물렀다. 자연에서 성자를 본 작가가 ‘나무의 미덕’을 쫓는 모습이 기자의 눈에 아른거렸다.   

이양하 작가는 개쭝나무에서 ‘군자의 풍모’, 히말라야 으름덩굴에서 ‘겸허하게 인내하며 사는 삶의 모습’, 마로니에 나무에서 ‘심신의 조용함과 평화로움’, 성균관의 은행나무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한 위엄’을 보았다. 문학 작품에서만 보았던 자연 예찬을 직접 보고 느끼며 경험하고 나서, 기자는 “많은 작가들이 왜 자연과 나무를 그토록 화려하게 표현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이양하를 비롯한 많은 문학 작가들은 나무 자체에 대한 감상은 물론, 주변의 풍경과 당시 분위기까지 더해 작품 속에서 감각적인 어휘로 표현한 것이다. 이양하 작가는 나무와 같은 평범한 소재를 중심에 놓고 깊은 사색을 표출하며,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지향했다. 이러한 작가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표현들이 모여 있는 수필 『나무의 위의』(1960)는 현시대 사람들이 읽고 사색에 잠기기에 좋은 글이다. 나뭇잎이 풍성하게 무르익어가는 가을을 지나고 있다. 요즘 같은 날 밖에 나가 자연을 천천히 둘러보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을 다시금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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