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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줄 수 있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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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쓰기가 이토록 어려운 기사가 지금껏 있었던가. “필자를 ‘기자’로 지칭한단 말이야?” 처음 S동 211호를 작성할 때 이 글에서는 스스로를 ‘기자’로 쓴다는 점에 대해 배우며 깜짝 놀라던 기자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마치 자기 이름을 자기가 부르는 것처럼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다소 쑥스러워 했던 기억. 약 2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자는 이제 스스로를 ‘이산희 기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칼럼의 주어를 ‘기자가’로 하는 것도 참 능숙한 사람이 되었다. 서랍에 빼곡하게 남은 기자의 홍대신문 명함이 무색하다. 아직 기자의 명함이 저렇게 많이 남았는데, 이제 실수하지 않고 취재나 마감 절차를 잘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이젠 남은 것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할 때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흔히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미화된다고 한다.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별 것 아닌 일처럼 여겨지거나 심지어는 추억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 조작’은 홍대신문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자는 아닌 것 같다. 기자의 생각보다 기자가 소심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속이 좁은 사람이었는지, 퇴임을 코앞에 둔 지금 ‘기자’로 존재하며 받았던 무수한 상처들이 다시금 떠오르는 기분이 가장 먼저 든다. 

학생 기자로서의 시간은 겪어 본 사람들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학교라는 거대한 체제에 대해 분석하거나 유명 인사를 만나거나, 또는 체계적인 기획을 바탕으로 학교보다 더 큰 세상에 대해 탐구하고 고찰하기도 한다. 기자에게는 기자라는 명목으로 행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소중한 기억이었으며 기자의 미래에도 귀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사에 대한 항의나 비난의 목소리, 또는 비웃음까지도 모두 기자의 몫이었다는 점이 기자를 참 힘들게 했다. 이에 대해 ‘그래도 견딜 만 했다’라는 씩씩한 말로 마무리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이번에는 그저 솔직한 기자의 마음을 가식 없이 써내려가고 싶다. 마지막 S동 211호니까 말이다. 

두려웠다. 남들처럼 나쁜 기억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사는 것이, 그 마음이 남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자만으로 번져 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내가 받은 상처가 손에 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거의 빠져나가고 조그만 생채기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도, 남에게 ‘나도 힘들었으니까 너도 이 정도는 견뎌야 해’라며 상처를 한아름 안겨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기자를 무섭게 했다. 손을 덜덜 떨며 항의 전화를 받다가 밤새 울다 잠들었던 과거의 기억이 남의 아픔에 무감각한 한 인간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초반에는 알량한 책임감을 등에 업고 힘겨워 했다면, 신문사에서 기자로 존재하는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필연적으로 넓어지던 인간관계에서는 기자가 가장 싫어했던 인간의 한 부류가 되어 가는 것을 경계하는 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던 것 같다. 

지난 주 기자의 동기가 쓴 ‘S동 211호’의 제목은 ‘글의 뒤에는 사람이 있다’이다. 이 제목이 기자에게는 글의 뒤에 단지 ‘기자’가 아닌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보내는 간절한 외침으로 느껴졌다. 퇴임을 앞둔 기자는, 떠나고 남은 이들이 글 뒤의 한 인간으로 남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라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하는 기자의 마음과 당부를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인데, 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줄 수 있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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