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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단위로 쏟아지는 추모 기획, 그리고 네 줄짜리 단신 부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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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5일(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사망했다. 이건희 회장은 누구나 그렇듯 공(功)과 과(過)가 있는 사람이다. 이 회장은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으킨 공을 세웠지만, 한국 사회에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한 과도 남겼다. 사업장에 기초적인 안전설비조차 마련하지 않아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가면서도 그 책임은 교묘히 피해 간 사실도,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이곳저곳 로비를 하며 국민연금이 모든 주주와 국민에게 손해가 되는 결정을 하게끔 한 사실도 분명한 과일 것이다.

10월 25일(일) 하루 동안 TV를 보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라디오를 들으며 ‘이건희’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실제로 검색해보니 25일(일) 하루 연합뉴스의 이건희 회장 사망 관련 기사가 단순 사진 기사를 제외해도 89개에 이르렀다. 연합뉴스는 다른 언론에 기사를 제공하는 통신사다. 즉, 연합뉴스 한 곳에서만 전국의 무수히 많은 언론사에 89번이나 기삿거리를 보내준 셈이다. 그만큼 그날 이건희 회장의 사망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씁쓸했다. 이건희 회장 사망 기사로 도배된 그 언론사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딱 하루, 딱 한 칸만,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안전장비 없이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의 소식(2007년 사망, 故 황유미 씨)이 나왔다면. 노동조합 탄압에 반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삼성 노동자의 시신을 삼성 측으로부터 뒷돈을 받은 경찰이 탈취해 무단으로 화장해버린 사건(2014년 사망, 故 염호석 씨)이 나왔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단 하루라도 언론사의 메인 기사란에 실렸다면, 그 후로 무고한 목숨 몇 명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살맛 나는 곳으로 바뀌려면, 재벌 회장의 부고 기사보다 평생 가난하게 살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기사가 더 필요하다.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을 믿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람의 삶과 죽음조차 불평등하다는 사실은 이번 계기에 깨달았다. 이건희 회장의 죽음은 온 세상이 다 알지만, 故 염호석 씨 사건은 아는 사람만 안다. 이건희 회장 사망 기사는 초 단위로 쏟아져 나왔지만, 최근 홍대입구역 삼성디지털프라자 리모델링 공사현장에서 엘리베이터에 끼어 사망한 노동자의 부고를 알리던 유일한 기사는 달랑 4줄이었다. 추모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야 할 애도의 마음이 찢기는 것만 같다.

OECD 가입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이 23년간 21번이나 1위를 기록했지만, 산업재해를 빈번히 유발한 기업에 현실적인 부담을 지게끔 하는 법 하나 없는 우리나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산업재해는 일어나고 있다. 돈 한 푼 들이면 일어나지 않았을 죽음들이 이어지고, 그 죽음은 ‘경찰이 자세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라는 말로 끝나는 네 줄짜리 단신 기사로 묻히고 있다. 그 소식 하나하나가 분명 제도를 바꾸고 관행을 바꿀 수 있는 사실들인데, 단지 권력자보다 힘이 없기에 매번 묻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공동체를 조금이나마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데에 관심이 있다면, 언론이 주목하지 않더라도 우리 곁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더 깊이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이에 공감한다면 잠시 우리 곁을 살펴보자. 홍문관(R동) 지하 6층 환풍구로 매캐한 매연이 들어오는 휴게실에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있고, 노동청으로부터 시정 권고까지 받았지만 ‘지상에는 점포 임대를 해야 하니 휴게실은 옮겨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학교가 있다. 또 과로로 출근 도중 쓰러져 숨을 거둔 중앙도서관 경비 노동자가 있었고, 학생들이 직접 차린 그의 분향소를 3일 내내 감시하며 철거하라고 압박한 학교가 있다. 

올해 본교 졸업식이 드라이브스루(Drive-Thru)로 진행되었다는 기사는 수십 건을 볼 수 있었지만, 본교 중앙도서관의 경비 노동자가 과로사했다는 기사는 딱 두 건이었다. 나머지 본교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 기사들도 그 수는 비슷하다. 묻고 싶다. 우리와 우리 곁의 삶은 과연 평등한가. 이건희 회장과 ‘네 줄짜리 단신 기사’로 기록되는 사람 중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 곁 ‘네 줄짜리 단신 기사’와 같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우리는 충분한 관심을 보이는지. 어쩌면 우리도 그 ‘네 줄짜리’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김민석(법학3) 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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