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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2> 박상준 교수가 추천하는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 문학동네, 2003

“처음에 나는 로자 아줌마가 매월 받는 우편환 때문에 나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중략) 누군가가 나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중략) 나는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아랍 꼬마 ‘모모’는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유대인 아줌마 ‘로자’와 살고 있다. 95킬로그램이라는 몸무게를 이끌고. 2층부터 층을 세는 프랑스식으로 6층, 우리 식으로 7층의 계단을 매일같이 오르내리는 일이 65세의 아줌마에게는 녹록지 않다. 그런 아줌마에게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달려있다. 모모를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은 아줌마의 아이가 아니다. 모두 창녀의 아이들이다. 부도덕한 부모 밑에서 자녀들을 키울 수 없다고 국가는 아이들의 (부)모님들에게는 양육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로자 아줌마도 옛적에는 창녀였다. 이제 더이상은 아니지만. 가끔 찾아오는 아이들의 엄마들 중에 모모의 엄마는 없다. 그녀는 한 번도 모모를 찾아온 적이 없다. 이 동네에 없는 것이 모모의 엄마뿐이랴. 이 동네에는 ‘프랑스인’도 거의 없다. 모두 아랍인, 유태인, 흑인이다. 어찌 되었든 ‘프랑스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백인은 건너편 동네에 산다. 로자 아줌마도 나치를 피해 프랑스로 들어와 살게 된 폴란드 사람이다. 나치의 습격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가끔 발작이 일어날 때면 유대인의 동굴이라 부르는 지하실 침실에 숨어들어 한참을 보내곤 한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로자 아줌마를 괴롭히는 살들은,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으니까 생긴 것들이다. 최소한 모모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줌마의 치매가 심해지고, 온전히 작동하는 내장 기관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살들도 조금씩 줄어들었을까? 이웃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아줌마를 도우려 했다. 매춘이 일상이고 마약이 성행하는 모모의 동네는 밖에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구역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어 뚱보가 되어 버린 로자 아줌마를 돌보려는,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약간이라도 정신이 들 때면, 로자 아주머니는 ‘죽지 않게 보살펴주는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유대인의 동굴로 최후의 피신을 한 아줌마에게도 아름다운 갈색 머리와 앞날을 향한 미소를 지니고 있던 시절이 있었겠지. 향수와 짙은 화장이 더이상 그녀의 썩어가는 몸을 감출 수 없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내 앞의 생이 나를 짓밟고 가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아줌마는 이스라엘로 떠났어요” 친척들이 “아줌마를 데리러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아주머니를 찾는 사람들에게 둘러대던 모모의 거짓말은 짙은 화장으로도 쏟아부은 향수로도 감출 수 없었던, 생이 남겨 놓은 로자 아줌마의 악취 때문에 끝내 탄로 나고 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내 앞에 놓여 있는 생을 만나러 가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하밀 할아버지가 말했다.

『자기 앞의 생』은 내 앞의 생을 옆 사람들과 함께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人,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이기도 하고,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 휘적휘적 큰 걸음으로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둘이 서로 기대고 있어야 하리라. 그렇게 둘이 서로 기대고 싶지만,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소년의 이야기. 마침내 죽음을 넘어서 자기 앞의 생을 대하게 되는 이야기. 『자기 앞의 생』은 1975년 프랑스 문단의 최고 권위인 공쿠르 상을 받았다. 하지만 작가에 대해서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 말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누구일까? 추측이 난무한다. 해답은 예상치 않은 방법으로 알려진다. 1980년 다른 한 명의 공쿠르 상 수상 작가 로맹 가리가 남긴 유서에서 『자기 앞의 생』을 쓴 에밀 아자르가 누구인지 밝혀진다. “내가 에밀 아자르입니다.”

이미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사이에는 수많은 문장과 문체의 유사성이 있었지만, 프랑스 문단의 평론가들은 애써 눈을 감으며 둘 사이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맹 가리는 이미 이런 글을 쓸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는 끝난 작가입니다. 그가 이런 글을 썼다니요”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라는 등식은 평론가들과 기자들의 허위의식, 무능함, 독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정리 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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