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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을 전하는 메신저, 포스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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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의역 9-4 환승 게이트.’ 작년 초여름 한 청년에게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고에 우리나라는 함께 분노했고, 함께 슬퍼했다.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고현장을 찾았고 밋밋했던 유리창은 곧 그를 추모하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으로 밝게 빛났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포스트잇을 통한 추모는 그 어떤 방식보다 깊게, 그러나 날카롭게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실패한 발명품에서 출발한 포스트잇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메신저로 성장했다. 시대를 거치며 다양하게 변모한 포스트잇(Post-it)의 모습을 짚어보자.

 

실패한 발명품에서 사랑 받는 사무용품으로

  1970년, 미국 미네소타광업제조(Minnesota Mining and Manufacturing, 현 3M의 전신)의 과학자 스펜서 실버(Spencer Silver,1994-) 박사는 우연히 접착력이 약하고 끈적이는 접착제를 개발했다. 그러나 그 당시실버의 접착제는 업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접착제는 본래 한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실버가 개발한 접착제는 이러한 접착제의 본래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버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이를 사내 기술 세미나에 보고했다.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영영 사라질 뻔했던 실버의 접착제는 사내 세미나에 참석했던 아서 프라이(Athur Fry, 1931-)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찬양을 부를 곡에 끼워넣었던 서표가 계속 빠져나가 불편을 겪곤 했다. 이에 그는 쉽게 붙였다 떼어낼 수 있는 실버의 접착제에 주목했다. 그는 손쉽게 붙일 수 있고, 떼어내도 자국이 남지 않는 접착제의특성이 찬송가의 서표를 고정시키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프라이는 연구를 거듭하여 붙였다가도 깔끔하게 떼어낼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접착제를 바른 종잇조각을 발명했다. 이 발명품의 이름이 바로 훗날 포스트잇으로 이름을 알린 ‘포스트 스틱노트(Post Stick Note)’이다. 포스트잇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런 물건을 어디에 쓰냐.”라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 출시 초기의 포스트잇은 시장진입에 실패했다. 그러나 프라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의 비서들에게 견본품을 보냈다. 놀랍게도 이들은 금세 포스트잇의 기능에 사로잡혔다. 간단한 스케줄을 적어놓고, 중요한 일을 메모한 뒤 간편하게 붙일 수 있는 메모지로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980년대에는 포스트잇이 미국 전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으며, AP통신에서 선정한 ‘20세기 10대 히트상품’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포기하지 않은 발명가에 의해 실패한 발명품에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사무 필수용품으로 거듭난 것이다. 뉴욕 광고 회사들의 포스트잇 아트 전쟁2016년 5월 뉴욕, 마주 보고 있는 두 건물사이에 유쾌한 전쟁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전쟁에 쓰인 무기는 바로 포스트잇. 사건의 발단은 뉴욕의 어느 한 미디어 대행사 직원의 작은 일탈로부터 시작되었다. 미디어대행사 직원이 창문에 ‘안녕(Hi)’라는 간단한 인사를 포스트잇으로 붙여놓자, 이를 본 반대편 건물 사람들이 포스트잇을 활용하여 ‘무슨 일이야(Sup)’라며 대답을 한 것. 이내 그들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수준에서 배트맨과 아이언맨, 심슨 캐릭터와 도널드 트럼프 등 각종 그림을 포스트잇으로 표현해 내기 시작했다. 단순한 대화부터 정교한 모자이크까지 단조로웠던 빌딩 숲이 직원들의 창의력과 예술성을 뽐내는 도심 속 이색 전시회로 탈바꿈했다. 그들은 더욱 화려하고 멋진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야근을 자처하기도 했으며, 이를 본 3M에서는 포스트잇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약3주간 이어진 이 유쾌한 전쟁은 건물주의포스트잇 철거 명령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한 직원들은 마지막까지 유쾌함을 잃지 않으며, 회사가 사용하고 있던 8개 층을 전부 활용하여 손에서 마이크를 내려놓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포스트잇 전쟁의 막을 내렸다. 사무용품으로만 쓰이던 포스트잇은 이제 모자이크 기법을 통한 작품창작의 도구로,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었다.

포스트잇, 광장으로 나오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포스트잇은 단순한 사무용품을 뛰어넘어 시민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대자보의 역할까지 그 기능을 확대하고 있다. 포스트잇이 이러한 역할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5월 일어난 강남역살인사건부터이다. 한 여성의 비극적인 죽음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내 10번 출구는 본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각양각색의 수많은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혹은 즉각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동시에 피해자를 추모했다. 포스트잇을 통한 의사 표현은 온라인에서 여론이 형성되듯 여러 의견이 충돌하여 갈등을 빚기도 하며 그 자체로 공론장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이러한 포스트잇은 구의역 9-4환승게이트로 이어졌다. 명백한 시스템의부재로 일어난 필연적인 사고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한 청년의 죽음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은 개인에 대한 애도를 넘어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강남역과 구의역에서 벌어진 포스트잇 추모행렬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낳았고, 이를 통해 포스트잇은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정치적 미디어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포스트잇 추모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포스트잇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바로 오프라인이라는 특성이다. 온라인으로 의견을 표현하는 데 익숙해진 현시대에, 사람들은 직접 포스트잇에 글을 써서 자신의 의견을 게재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온라인과는 다르게 ‘직접’쓰인, 개인의 감정과 의지를 담은 ‘손글씨’에 매료되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잇은 ‘현재성’을 가진다. 포스트잇을 통해 추모를 하기 위해서는, 한 개인이 특정 장소에 직접 들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특정한 장소와 감정이 담긴 손글씨가 만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거대한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본래 이러한 의사 표현이 이루어졌던 방식은 바로 ‘대자보’였다. 대자보가 정형화되고 꾸며진 글로사람들에게 단체의 의견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포스트잇에는 개인의 감정과 의지가 흠뻑 묻어나온다. 따라서 사람들이포스트잇을 붙이는 행위는 단순히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닌, 그 행위 자체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의지를 나타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사무용품에서 시민들의 목소리로

  다시, 포스트잇의 본래 기능을 떠올려보자.‘무엇인가를 잊지 않도록 ‘기억’하기 위해서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기 위한 것.’ 위에서 살펴본 두 사례는 아마도 이러한 포스트잇의 본래 기능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비극적인 사건을 기억하자는 의미,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를 기억하고, 바꾸어 나가자는 의지를 포스트잇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직접 그 장소에 찾아가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오프라인 방식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포스트잇 광장은 미디어 시대를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스트잇이라는 한정된 작은 공간에 즉각적으로 메시지를 남기고, 그렇게 수많은 메시지가 쌓여 확산되는 것이 현재 세대의 소셜네트워크(Social Network)와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다. 각종 추모의 현장과 사건 현장에 포스트잇이 등장하는 것은 소셜네트워크에 익숙한 세대의 당연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성격이 무엇이든, 포스트잇으로이루어진 광장에는 누구든 연설의 주체가 되어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다. 그곳에선 모든 개개인이 참여자이자 주최자다. 일전에 이러한 역할을 하던 대자보, 촛불집회와 더불어 포스트잇 민주주의 시대가 발돋움한 것이다. 실수로 탄생했던 포스트잇은 이제 그 본래 의미를 넘어, 오늘도 곳곳에서 우리에게 끈적하게, 무엇인가를 ‘잊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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