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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문과 핍박이 존재한 서대문 형무소, <항거:유관순 이야기>(2019)

잊으면 안 되는 그날과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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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은 학생들에겐 개학과 개강 하루 전날 또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날, 직장인들에겐 하루 쉴 수 있는 ‘꿀’같은 공휴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약 100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선 태극기가 흩날리며 사람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조민호(1967~) 감독의 <항거:유관순 이야기>(2019)는 3·1절 100주년을 맞아 개봉됐다. 영화의 이야기는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서대문 형무소의 3평 남짓한 여옥사 제8호실에서 진행된다. 온갖 고문과 핍박이 존재했던 그곳에서도 만세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그녀들의 독립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었을까.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으며, 독립을 향한 의지는 누구보다 굳센 그녀들이 궁금해져 영화 속 그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서대문 형무소의 모습
▲서대문 형무소의 모습

“내 말 잘 들어! 너 가만히 있어라 3년 동안 가만히 죽은 듯이 있으란 말이야! 안 그럼 살아서 못 나간다. 알았나?”

기자는 영화의 주 배경인 서대문 형무소로 향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일본제국주의가 건설한 근대식 감옥으로, 1908년 10월에 문을 열어 1987년 11월에 폐쇄될 때까지 약 80년 동안 사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史蹟) 제324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한국 근대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지만 기자가 방문했을 땐 코로나19 때문인지 관람객이 없어 쓸쓸했다. 이 곳에서 그녀들은 어떤 생활을 했고 그녀들이 수감된 곳은 어땠을까.

▲옥사 내부의 모습
▲옥사 내부의 모습

8호실 아주머니 : 내 저년 알어, 경성서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잘난 물만 잔뜩 들었지?

유관순 : 아주머니...

8호실 아주머니 : 그려 나 만석 애미여, 니가 고향까지 와서 설쳐대서 몇 고을 쑥대밭 되고, 니 애미 애비까지 그 난리에... 내 아들내미도 칼 맞아 죽고... 아이고... 아이고... 그깟 독립이 뭣이 중요하다고...

김향화 : 그만 좀 하시죠. 만세,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

8호실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가 고향 아주머니를 만나 나눈 대화이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재학 중 만세운동에 관한 정보를 듣고 고향인 천안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1919년 4월 1일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지만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다. 기자는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여옥사 8호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옥사는 철거됐다가 일부분을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기자가 방문한 여옥사는 과거와 다르게 창문이 막혀있음에도 여전히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들이 한겨울에도 두꺼운 옷 없이 버텼을 생각을 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영화 속에서 그녀들은 느린 걸음으로 8호실 안을 빙빙 돌았다. 가만히 서있으면 다리가 붓는다는 이유였다. 8호실을 들어가 보니 영화에서 본 것보다 더 비좁게 느껴졌다. 3평 남짓한 공간에서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감되니 누울 자리는커녕 앉아있을 자리조차 없었다. 관람객 없는 옥사를 혼자 거닐다 보니 더욱 삭막하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8호실 수감자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여간수 : 조용히 해!

유관순 : 우리 꼭 개구리들 같네요

8호실 아주머니 : 그것이 뭔소리여?

김향화 : 맞네 울다가 누가 오면 딱 멈추는 개구리

8호실 수감자들 : 맞네, 개굴 개굴 개굴 개굴 개굴, 우린 개구리가 아니다!

8호실에서 시작된 아리랑은 여옥사 전체로 퍼지게 된다. 8호실의 여간수가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만 8호실의 사람들은 “우린 개구리가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이에 조선인 출신 순사(巡査) ‘니시다’가 “우린 개구리가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을 고문하기 위해 8호실에서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한다. 당사자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유관순은 자신이 했다며 벌을 대신 받는다. 유관순은 고문실로 끌려가 고문당한 뒤, 벽관에 감금된다. 기자는 똑같이 8호실에서 나와 보안과 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 지하실엔 온갖 고문 기구들과 고문을 당하는 마네킹들이 전시 돼있었다. 기자가 움직일 때마다 센서를 통해 비명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왔다. 잔혹한 고문 장비들을 보니 일제의 잔혹함을 알 수 있었으며, 그 고문에 굴하지 않았던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존경스러웠다.

유관순 : 잠시만요, 남옥사 쪽은 어떻습니까?

소지 : 궁금한게 뭐요?

유관순 : 작년... 그날이... 곧 다가 오잖아요?

기자는 옥사 뒤편에 있는 공작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작사는 재소자들이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던 공장이다. 이곳에서 유관순은 날짜를 알기 위해 옥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노역을 신청했다. 만세운동 1주년을 기점으로 옥사 내에서 만세운동을 하기 위해 유관순은 힘든 노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옥사 내에서 만세운동이라니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으랴. 3월 1일 유관순은 노역 도중 쓰러진 척한다. 이에 순사는 다른 재소자를 시켜 유관순을 옥사 안으로 들인다. 업혀서 옥사로 들어온 유관순은 사람들과 함께 옥사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한다. 이 만세운동은 옥사 바깥으로 퍼져나가 서대문 일대에 만세운동이 퍼지게 된다. 이로 인해 만세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또 한 번 심한 고문을 당한다.

“만세를 부르는 것은 너희 일본 때문이다. 아직도 모르느냐?”

유관순이 고문을 받으며 한 말이다. 옥사 내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당시 일왕인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모든 수형자의 형기가 반으로 줄지만, 유관순은 고문과 구타로 인한 방광 및 자궁 파열로 출소 이틀 전인, 1920년 9월 28일 사망했다. 영화는 유관순이 혼자 남은 8호실에서 눈을 감으며 끝이 난다. 일제는 유관순의 시신을 몰래 화장하기 위해 석유통에 넣었으나 이 사실을 알아챈 이화학당 측의 요구로 가까스로 이화학당으로 인도된다. 이로 인해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지만, 1939년 일제가 그곳에 비행장을 건설하며 시신은 유실되고 만다. 기자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래 사형장 앞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 미루나무는 사형장이 건설됐을 때 심어졌으며, 사형수들이 사형장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에 붙잡고 울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렸다. 하지만 기자가 사형장 앞에 도착했을 때는, 방수 천으로 덮여있는 쓰러진 나무 한 그루와 ‘통곡의 미루나무’는 고사했다는 안내 팻말만이 있었다. 기자는 고사한 ‘통곡의 미루나무’를 보며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들의 한을 담고 있는 이 나무가 없어져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분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형장을 나오면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인 시구문이 나온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거나 사형 사실이 알려졌을 때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에 내보냈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도 이 통로를 통해 나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우내 독립 만세 운동 기념 공원의 모습
▲아우내 독립 만세 운동 기념 공원의 모습

기자는 서대문 형무소 관람을 끝내고 곧장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있는 아우내 장터로 출발했다. 아우내 장터 일대에는 유관순 열사에 관한 관광지와 기념비들이 많이 있었지만, 기자는 아우내 장터 근처 아우내 독립만세 기념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 공원비, 독립 만세운동 조형물 등이 있었다. 조형물은 유관순 열사를 필두로 여자, 아이 모두 태극기를 들고 총을 겨누고 있는 일본 순사에게 맞서고 있었다. 100년 전 이곳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기자는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기자는 이때까지 자신은 ‘100년 전에 태어났으면 당연히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고 난 뒤, 부끄럽게도 ‘과연 내가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기사를 쓰며 ‘100년 전에 독립운동을 하신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것,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어제 태극기를 걸어두지 않았다면 하루가 늦은 오늘이라도 태극기를 걸어두며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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