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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에서 맞이한 『달밤』(1933)

사라져가는 순수함에 대한 따뜻한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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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여유를 만끽하거나, 그 운치를 즐겨보는 것은 까마득하게 먼 일로 느껴진다. 기자가 이태준의 단편소설 『달밤』(1933)에 눈길이 간 이유는 달밤의 서정을 느낀 지 꽤 오래됐기 때문이다. 밤의 분위기가 그리워서였을까. 기자는 달밤을 소재로 한 이 짧은 소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이태준은 순박하면서도 어수룩한 ‘황수건’을 소설 전면에 내세워 사라져가는 순수함을 다룬다.

『달밤』은 성북동으로 이사 온 지 대엿새 된 ‘나’의 집에 늦은 밤 황수건이 신문 배달을 오며 시작된다. 황수건은 순박하고 붙임성 좋은 인물이다. 다만 어수룩해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놀림당하기 일쑤다. 그러던 그가 간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일까. 그는 신문을 배달하러 ‘나’의 가옥에 찾아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나’와 대화를 나눈다.

▲황수건이 드나들었을 고택의 정문
▲황수건이 드나들었을 고택의 정문

기자는 소설 속 ‘나’와 황수건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성북동을 찾았다. 지나가며 성북동을 본 적 있으나, 성북동 깊이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자는 한성대입구역에서 한참을 걸어 소설의 배경인 상허 이태준 고택을 찾았다. 고택은 이태준의 손녀가 고택의 당호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을 그대로 따 찻집으로 보존되고 있다.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수연산방이 알려져서인지 한적한 주위와 달리 수연산방 부근만 북적였다. 기자는 한참을 기다려 수연산방의 안방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아담한 방 안에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택은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편에 건넌방, 오른편에 안방이 있었다. 그리고 안방 앞에는 누마루가,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따뜻한 차와 함께 고택의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다보니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져 하늘이 검게 변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아무리 오래 지껄이고 나도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중만 아니면 한참씩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황수건은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다른 집 신문 배달은 잊고 밤늦게까지 ‘나’와 대화하고는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반편(半偏) 취급을 받는 황수건이지만, ‘나’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의 말동무가 돼 준다. 기자는 수연산방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며 활짝 웃는 사람들을 보며 ‘나’와 수건이 친구가 된 이유를 생각해봤다. 아마 ‘나’는 성북동에 막 이사 왔기에 낯선 곳에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황수건은 심성이 착하고 대화하기 좋아하는 인물이지만,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준 것이다. 누구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 친구 한 명 없이 낯선 곳으로 떠난 적이 있을 것이다. 기자 또한 도전에 대한 열망만 품고 낯선 곳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마음 맞는 친구 한 명을 만나는 게 얼마나 반갑던지, 그 친구와 하루의 회한을 푸는 것이 큰 위안이 되고 행복했었다. ‘나’와 황수건도 서로에게 그런 따뜻한 존재이지 않았을까.

어느 날, ‘나’가 황수건에게 평생소원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보조배달을 벗어나 원배달이 되고 싶다 했다. 그 후, 하루는 수건이 원배달 소원이 이뤄졌다며 바깥마당에서부터 ‘나’에게 자랑하며 왔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즐거워한다. 하지만 황수건은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나’의 집에 신문 배달을 오지 않는다. 이후 대뜸 방울을 차고 집으로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배달원이었다. 

 

▲성북초등학교
▲성북초등학교

“그럼, 전엣사람은 어디를 맡았소?” 하니 그는 픽 웃으며,

“그까짓 반편을 어딜 맡깁니까? 배달부로 쓸랴다가 똑똑지가 못하니까 안 쓰고 말었나 봅니다.”한다.

(중략)

나는 가까운 친구를 먼 곳에 보낸 것처럼, 아니 친구가 큰 사업에나 실패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못 만나는 섭섭뿐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다. 그 당자와 함께 세상의 야박함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기자는 밤이 깊어가는 수연산방을 나서며 ‘나’가 당시 느꼈을 감정을 생각해봤다. 매일 부푼 꿈을 안고 해맑게 찾아왔던 사람이 한순간에 떠나버렸을 때 ‘나’가 느꼈을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수건이 떠난 후, ‘나’는 동네 사람으로부터 수건이 삼산학교에 급사로 있을 때의 일화를 듣게 된다. 수건은 당시에도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겨 종소리를 울리는 것도 잊고, 그저 손님이 오면 잘 하지도 못하는 일본말 연습만을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 쫓겨났다고 한다. 기자는 수연산방을 들른 다음 날, 황수건이 일하던 곳인 ‘삼산학교’로 추정되는 성북초등학교를 찾았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학교 건물 외관을 보니 수건의 모습이 떠올라 왠지 모를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황수건도 자신만의 색을 마음껏 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더 밝게 빛났을 수 있었을까’하는 마음이었다. 

하늘의 검은 빛이 완연해질 때쯤, 기자는 어제 들렀던 수연산방 쪽으로 걸어가 언덕을 따라 올라갔다. 이태준이 고택에 머물던 때에는 수연산방 근처가 모두 산이었겠지만, 지금은 모두 개발돼 가파른 언덕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따라서 건물이 없는 곳까지는 꽤 올라야만 했다. 한참 언덕길을 오르던 기자는 어느덧 북악산 부근에 이르렀다. 아직 완연한 봄이 오지 않아 밤공기는 제법 찼다. 기자는 가파른 언덕 계단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주변은 지나다니는 차 한 대 없이 고요했다. 황수건이 느꼈을 외로움과 쓸쓸함이 더 와닿는 밤이었다.

어느 날, 황수건은 갑자기 ‘나’의 집에 찾아와 최근 군밤 장사, 왜떡 장사 등을 한다고 근황을 전했다. ‘나’는 그에게 참외 장사에 보태라고 돈 삼 원을 쥐어 준다. 그는 기뻐 춤을 추듯 뛰어나갔다. 하지만 여름 동안 수건은 ‘나’의 집에 들르지 않는다. 소문을 들어보니 참외 장사는 장마 때문에 망하고, 수건의 동서가 못되게 구는 바람에 그의 아내까지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천진난만하게 꿈을 좇지만, 사회에서 그 순수함은 자리를 잡지 못한다. 이후 황수건은 달포만에 ‘나’의 집에 찾아온다. “선생님 잡수라고 사 왔습죠”라며 포장되지도 않은 포도 대여섯 송이를 ‘나’에게 건넨다. 하지만 이윽고 한 사람이 ‘나’의 집에 와 수건이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간다. ‘나’는 수건이 포도를 훔친 것을 직감하고 그의 매를 말리며 포도값을 건네준다. 하지만 그새 수건은 떠나버린다. 

 

▲북악산에서 올려다본 밤하늘
▲북악산에서 올려다본 밤하늘

그런데 포도원께를 올라오노라니까 누가 맑지도 못한 목청으로,

“사……케……와 나……미다카 다메이……키……카…….”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중략) 

“수건인가?”하고 아는 체하려다 그가 나를 보면 무안해할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휙 길 아래로 내려서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었다. 

그는 길은 보지도 않고 달만 쳐다보며, 노래는 그 이상은 외우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였다.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담배를 이번엔 퍽퍽 빨면서 지나갔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소설은 수건이 포도를 준 뒤로부터 며칠 후, ‘나’가 포도원께를 지나며 황수건의 구슬픈 노래를 듣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기자는 북악산 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수건에게는 차갑기만 한 현실과 수건의 따뜻한 마음씨를 동시에 떠올렸다. 물론 포도를 훔친 것은 잘못한 것이지만, 수건은 그렇게나마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수건의 순수함과 따뜻한 마음은 소설 마지막까지 빛을 보지 못한다. 그의 달밤은 달빛이 내리는 찬란한 밤이 아닌 외롭고 차가운 밤일뿐이었다. 기자가 북악산에 간 그날 밤하늘에는 초승달만 혼자 외로이 떠 밤공기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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